2024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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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달집 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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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 당선자 이하언씨
▲ 심사위원 구중서, 유홍종
 
글=이하언/  삽화=김복태


 차츰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간다. 청, 황, 적색의 삼색 띠를 두른 상쇠가 두드리는 꽹과리에 맞춰 풍물패의 신명은 더욱 도도해져가고 있다. 어두워지면서 바람은 더욱 차갑다. 하지만 이월의 칼바람도 천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힘을 잃는다. 풍물패에 휩싸여 어깨춤을 덩실대는 사람들은 흥겹기만 하다.

 사람들 속을 파고들지 못한 바람은 방향을 돌려, 무리와 떨어져 서있는 은주에게 부딪혀 온다. 은주는 어깨를 움츠리며 여자를 돌아본다. 여자는 빳빳하게 굳어 추위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이 점차 짙어져 간다. 사람들의 설렘도 고조된다. 달 봤다! 마침내 누군가 첫소리를 터뜨린다. 질세라 사람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달 봤다! 동쪽하늘에서 달이 뜨고 있다. 달빛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감동으로 겨워있다. 마침내 달은 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방으로 은빛가루가 뿌려진다.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달집에도 불이 붙는다. 미리 휘발유를 뿌려둔 뒤라 순식간에 이십여 미터 높이의 달집은 불덩어리가 되어 활활 타 오른다. 풍악소리는 더욱 높아져가고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다. 달집돌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타는 달집을 도는 사람들의 무리는 불빛의 흔들림에 따라 같이 흔들린다. 이 모든 것을 다 끌어안을 만큼 넉넉해진 달이 불타는 달집과 사람들의 기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두 손 모으고 경건하게 달집돌이를 하고 있는 무리들 속에서 은주는 엄마를 찾아낸다. 불빛에 그림자를 일렁이며 달집 쪽으로 향해 걸어가는 최 원장도 보인다. 멀리 떨어져있어도 불의 힘은  느낄 수 있다. 여자의 눈동자는 불빛과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다.

 달빛과 타오르는 불빛과 그 속의 여자는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붙들어주고 싶다, 무심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은주는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자기의 것이 아닌듯한 느낌이 든다. 여자를 바라보는 눈길 또한 자기 것이 아닌 듯 낯설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달집이 타오르는 지금은 모든 생명이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아닌가. 은주는 찬찬히 여자를 살펴본다. 눈, 코, 입, 그 모두를.
 
 어젯밤에도 영우가 왔더구나. 저 문 밖에 서서 묵묵히 나를 보고만 있는기라. 나는 묶인 것 맹크로 꼼짝도 할 수 없고. 꿈속에서도 가슴이 미어져 숨이 턱턱 막히더라. 얼매나 무섭고 외로울 거나.

 식탁 앞에서 엄마가 중얼대었다. 오곡밥이었다.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는 은주를 보는 엄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그게 어찌 그리도 술술 입으로 들어갈 수 있냐는 타박은 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아퀴 짓듯 말했다.

 "늬가 뭐라카던 낼 모레 기일에 결혼식을 치룰 테니 이제 더는 딴 말하지 마라. 부정 탄다."

 오늘은 모든 악운을 씻어 보내고 정결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대보름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달의 생명력을 믿었다. 엄마가 평생 매달린 농사일도 달의 변화에 따라 풍, 흉년이 결정되었지만 오빠를 갖기 위해 기원 드린 대상도 달이었다. 엄마는 새 해 첫 보름달의 정기로 오빠의 내생까지 밝혀두고 싶어 했다.

 영혼 결혼이 거론되기 시작한 건 대여섯 달 쯤 전이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는 은주의 눈앞에 엄마가 대뜸 사진 한 장부터 들이 밀었다. 야야, 이 사진 좀 바라. 이십 오 육세정도 되었을까. 엄마가 내민 사진 속에는 긴 생머리의 한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만하면 인물도 수수하제? 난데없는 사진에 어리둥절해진 은주에게 엄마는 자랑스레 말했다. 늬 오빠 신부 감이야. 부모 생존하고 집안도 좋은 것 같더라. 영우도 마음에 들어할끼라. 양미간에 깊게 잡힌 엄마의 주름이 오래간만에 펴져있었다. 그 처자도 몇 달 전에 죽었다카더라. 교통사고였댄다. 하마터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줄 뻔했던 은주는 꿀꺽 말을 삼켰다. 짐을 덜고 싶은 것이었다, 엄마는.

 그러나 그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동성동본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다시 신부 감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쉬울 리 없었다. 게다가 엄마가 내세우는 조건은 까다롭기만 했다. 어쩌다 말이 나오면 집안이 어떠니 학벌이 어떠니 심지어 인물까지 따지고 들었다. 마음에 드는 신부 감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쪽에서 빈한한 은주네 집안을 타박하였다. 엄마는 분개하였다. 별꼴이야, 죽은 딸 시집보내기가 어디 쉬울 줄 알고. 엄마는 자신이 내세우는 조건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엄 교수에게 여자의 존재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엄마는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정한 신부 감은 익사했다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나이도 오빠보다 한 살 많았고 부모도 없이 할머니 손으로 컸다고 했다. 그동안 따져대던 조건에 비추어보면 가장 성에 차지 않아야 될 신부 감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물에 빠진 제자를 살리고 대신 죽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마음을 정해버렸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소용 없는기라. 자고로 마음 씀씀이가 깊고 헌신적인 색시가 최고지. 게다가 물은 불을 끌 수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궁합이 어디 있겠노.

 방으로 들어간 은주는 동료에게 전화해서 하루 연가 처리를 부탁했다.

 장롱 서랍을 열었다. 손을 밀어 넣자 손수건으로 돌돌말린 것이 잡혀 나왔다. 손수건을 풀자 기다린 듯 루비가 반짝 붉은 빛을 냈다. 은주는 그 분노 같은 붉은 빛을 우울하게 들여다보았다.

 같이 축원을 드리게 일찍 퇴근하라는 엄마의 말끝에 오늘 늦을지도 몰라. 퉁명스레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새벽바람이 차가웠다. 몸을 움츠리고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 따라 걷기 시작했다. 터미널에 가까워지자 건너편 서천교 천변에 솔가지나 짚단으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달집이 먼저 눈에 뜨였다. 시에서는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기다리는 달집태우기는 그 마지막 하이라이트였다.

 시간이 일러 대구로 가는 버스는 한산했다. 버스는 경주 터미널을 벗어나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내렸던 때늦은 폭설을 고즈넉하게 얹고 있는 산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져갔다. 하얀 눈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산줄기 음영을 돋을 새김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경산 쪽으로 접어든 후부터는 눈은 사라지고 버스는 빛바랜 사진첩 속 같은 스산한 풍경 속을 달렸다. 누런 산등성이 속에 얼핏 연분홍색을 본 듯했다. 창문에 이마를 대어 내다보니 지나치는 산등성이에서 간간이 움트는 생명의 조짐을 볼 수 있었다.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연약한 연두 빛들,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도 생명력은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런 끈질김들이 버거워질 때가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0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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