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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춘문예] 시 당선작

'해거름엔 포도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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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자 조미희씨


 
▲ 심사위원 신달자.김종철
 

`해거름엔  포도나무가 되고 싶다`
                                                                          


조미희

늦은 햇살에 감전된
그 떨림의 시작을 찾아 발 닿은 곳은
한번도 가 닿은 적 없는 빛의 계곡
간간이 어미 품을 파고드는 몸집 가벼운 산짐승
불쑥 나타나 내 눈동자를 밟고 사라진다
날숨 쉬며 기다려왔던 시간만큼
그제야
제 본래의 모습을 벗어버린
향기로 몸을 다듬은 풀꽃처럼 목이 긴 유리잔 속에서
휘청거리며 맴돌다 흘러내린 포도의 눈물은
침묵의 매듭을 푸는 향기가 된다
인도블록으로 가려진 푸석한 도심의 뿌리엔
빗물보다 진한 수혈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다
한 모금 머금고
상처 난 뿌리가 또 다른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는 동안
바람은 바람이 되어 소리를 내고
지친 몸을 내맡기는 평화는 길지 않아도 아름답다
어둠의 속살을 벗기는 한 방울의 포도즙은
둥글고 모난 아픔의 자리마다
손끝으로 흐르는 물길을 내고
땅을 들썩이는 뿌리엔 수액이 차올라
다가올 계절은 늘 푸르다
나무는
땅 밑과 땅 위에 몸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성자다
지상에 귀를 대고선 나무그림자 사이로
사람들이 남겨놓은 눈웃음이 가로등으로 반짝인다
사랑 한 올 명치 끝에서 풀려나와
골 깊은 가슴과 가슴을 지나
금가고 더께 진 생의 블록을 꿰매고 다듬는 동안
저녁 종소리엔 눈을 감는 하늘
해거름엔 모두
포도나무
그 가지가 되고 싶다



<시부문 당선소감>

 아침 해는 언제나 모국의 하늘에서 먼저 뜬다.

 단 한 번의 도전이 가지고 온 희소식은 지구의 끝자락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스윗스팟(Sweet Spot)" 바로 그것이었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빙산이 갈라지는 쩌렁쩌렁한 울림의 장관을 보는 듯 했다.

 서서히 이동하다 마침내 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기 본능의 웅장함.

 시가 내게로 다가올 때도 그러했다. 가장 나다운 자리로 돌아 왔을 때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생의 세포분열이었고 스스로를 추스르는 모험이고 도전이고 최고의 성역이 되어 주었다.

 먼저, 이국땅에서 고국으로 날아간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여주신 평화신문에 감사드린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기 쉬운 2, 3세들에게 모국어 문학을 꿈꾸는 새로운 방향 제시가 될 것이다. 문학을 통해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나비효과`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당선의 기쁨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재아 문인 협회 회원들, 함께 글을 나누는 평화문단 동인님들, 엄마 아빠나라의 차세대 작가들이 될 재아 가톨릭 한글학교 우리 개구쟁이들 그리고 이름 불러 감사드리고 싶은 많은 분들 무엇보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족, 대모님 대부님, 홀로계신 어머니, 가죽장갑을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가신 아버지께 바친다.

 ▨ 약력=

▲1961년 경북 칠곡 출생
▲91년 2월 아르헨티나로 이주
▲2006년 7월 재아르헨티나문인협회 문학작품 공모전서 `숨어 웃는 작은 행복`으로 시부문 최우수상
▲2006년 「문예춘추」(여름)에 `봄`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2006년 9월 `까라보보와 참나무`로 재외동포재단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현재 평화문단 동인, 재아문인협회원, 재아가톨릭한글학교 교사
▲세례명 : 아녜스, 본당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순교성인성당




<시부문 심사평>

 마지막까지 논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김혜경, 김은, 이문자, 그리고 조미희였다. 먼저 김혜경의 「광개토피씨방」 등의 작품은 생활에서 소재를 길어올리는 섬세한 시각과 상상력이 개성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시적 긴장감과 신인으로서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중론이었다. 다음 김은의 「배꼽참외」는 비록 소품이었으나 표현이 신선하고 명징한 이미지들을 구축하는데 노련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다만 함께 투고한 작품들이 균질하지 못하고 시적 대상을 장악하고 운용하는 부분에 있어 드러난 미숙함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당선을 겨루었던 이문자의 「사막」과 「앉은뱅이꽃」 등은 녹록치 않은 경지의 작품들이었다. 한 편 한 편이 오랜 벼림을 거쳐 공들여 쓰인 노작처럼 보였고, 사물이나 대상의 전형을 포착해내는 능력과 그것들을 단단하게 형상화해내는 능력이 특출했다. 다만 언어를 좀더 절제하고 유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이들과 마지막까지 숨가쁘게 겨루



가톨릭평화신문  200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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