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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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퍼즐'

이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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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여자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은 다시 비닐 팩으로 포장되어 있다. 팩의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안에 있는 것들을 바닥으로 쏟아 놓는다. 같은 크기의 조각들이 펼쳐진다. 여자는 퍼즐 조각들과 상자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그림을 번갈아 보며 윤곽을 잡는다. 이번 것은 2000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진 풍경화다. 앞에 있는 나무와 뒤에 보이는 산은 원근 처리가 되어 있지만 같은 초록색 계열인데다 그림 자체가 거의 옅은 색감을 가지고 있다. 2000개의 조각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여자의 호기심이 발동하고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당분간은 퇴근 이후의 스케줄이 정해진 셈이다.

 
여자는 어지럽게 엉켜있는 조각들을 그림이 잘 보이도록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쓸어 놓는다. 이 중 어느 것이 첫 번째가 되고 이천 번째가 될지는 모른다. 첫 번째도, 이천 번째도 퍼즐에서 무의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제자리가 있고 모든 것이 공평하다. 그 사실이 여자는 무척 마음에 든다. 처음 1000조각으로 된 퍼즐을 맞출 때는 맞추는 내내 1000개의 조각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과정에서, 아니면 비닐 팩 속으로 포장되는 순간에 하나쯤 바닥에 떨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찾아도 비어 있는 그림 조각을 찾지 못했을 때 여자는 이 퍼즐은 완성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00개의 조각이 500조각이 되고 다시 300조각, 20조각으로 좁혀 오면서 비어 있던 자리는 모두 채워지고 조각들은 각자 자리를 찾아갔다. 여자는 희열을 느꼈다. 여자의 인생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좁은 원룸 안에 퍼즐 조각이 가득 펼쳐져 있다. 등을 잔뜩 구부린 여자의 눈과 손이 빨리 움직인다. 퍼즐을 맞추면서 유일하게 진행이 빨리 되는 순간이다. 여자는 가장자리의 조각들을 걸러내는 중이다. 이 순간은 여자의 눈과 손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눈이 읽어 내는 것을 손이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자는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다. 그냥 모델이나 해라. 근사하게 누드 한번 그려줄게. 장난스레 던지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남자가 그려주는 그림이라면 분명 멋진 작품이 나올 것이다. 어쩌면 잘 소장하고 있다가 말년쯤에 화랑에 공개하거나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면 여자가 죽은 다음에라도 자식들은 여자의 덕을, 아니 남자의 덕을 톡톡히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정식으로 남자의 그림에 모델이 된 적은 없다. 남자가 여자의 옆모습을 크로키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몇 번 정도였고 여자가 싫은 내색을 하자 남자도 더 이상 여자를 그리지 않았다.

 여자는 구부린 등을 펴고 목운동을 한다. 정신을 집중한 탓에 잘 몰랐는데 막상 등을 펴니 목부터 어깨, 등까지 모두 근육이 경직되어 있다. 정적이지만 굉장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이런 고된 작업을 쉬지 않고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여자는 잘 분리해 놓은 가장자리 조각들을 좀 더 안전하게 한 쪽으로 몰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관절이 뻣뻣하게 움직인다.

 
 방 한 쪽에 있는 싱크대로 가서 여자는 찬장을 연다. 삼단으로 된 싱크대 선반에는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접시는 크기대로 분리가 되어 포개져 있다. 보라색 꽃이 그려있는 머그 컵 한 쌍이 제일 왼쪽에, 그리고 짝이 없는 나머지 컵들은 키 순서대로 놓여 있고 손잡이는 모두 오른쪽을 향해 있다. 왜 접시는 꼭 위층에 있는 거야?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안 되나? 남자가 정리하던 그릇을 빼앗아 여자는 원래 그릇들이 있던 자리에 놓았다. 매번 그렇게 하려면 힘들지 않니? 여자의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고, 마지막으로 컵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놓고 정리를 마친 여자가 찬장 문을 닫았다.
 
 여자는 가장 왼쪽에 있는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마신다. 선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니 좁은 방안이 퍼즐조각들로 어수선하다. 여자는 퍼즐 조각들을 한참 바라본다. 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조각들의 색깔이 불분명하다. 고요함을 깨뜨리듯 여자는 컵을 소리나게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이내 고요함에 묻혀 사라진다. 이렇게 조용하게 살기를 여자는 원했었다. 부모님과 다섯 남매가 섞여 사는 좁은 집은 각각의 존재감만으로도 항상 시끄러웠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가족을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와 가족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단절되었다.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딱지가 붙어 있을 때만 해도 가족들은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기도를 했다. 그때는 종교가 없던 아버지도 기도에 동참했다. 그러나 입시 준비가 한창이던 큰 언니의 콘트라베이스마저 잃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연주할 활조차도 살 수 없는 형편임을 알았다. 그때 일곱 명의 가족들은 갈 길이 정해져 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퍼즐 조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가장자리 조각들과 눈에 들어와 맞춘 몇 개의 특징적인 것들은 섞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리해 둔다. 상자의 뚜껑을 닫아 책상 아래에 밀어 넣고 나니 좁은 방안이 아까보다 훨씬 넓어 보인다. 여자는 욕실로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 퍼즐 조각들을 만졌던 손을 비누칠해서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질을 시작한다. 보글보글, 거품이 여자의 입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다. 저녁식사 이후 여자는 양치를 했다. 그 이후에 물 한 잔 마신 것밖에 없지만 여자는 다시 정성들여 입안을 헹궈낸다. 그리고 꼼꼼하게 치실을 사용하고 다시 가그린을 시작한다. 가글을 하면서 여자는 욕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본다. 가그린의 설명서에는 `약 1분간`이라고 적혀 있지만 여자는 정확히 초침을 재고 있다. 32초, 48초... 초바늘이 한 바퀴 돌고 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여자는 입안에 있는 것을 뱉어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여자는 잠자리에 들기 위한 준비를 끝낸다. 불을 끄기 전 다시 한번 시계를 본다. 12시 28분이다. 아직 30분이 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여자는 안심이 된다. 불을 끄자 여자의 눈앞에 퍼즐 조각들의 잔상이 남는다.


 
▲ [그림=김복태]
 

 외출 후 집으로 들어온 여자는 책상 옆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거기가 가방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정해놓은 적은 없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 가방을 두는 것이 편하다. 다섯 남매가 살던 집에서는 제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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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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