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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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었습니다

제3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대상작(상) 이송주(빅토리아, 인천교구 연수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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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나는 한 통의 반가운 목소릴 들었다. 나에겐 너무나도 감사한 목소리, 바로 제일병원 수녀님이시다. 나에게 은인이며 무한한 위안이 되시는 분이시다. 생명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시는 수녀님 말씀을 듣고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나의 임신기간과 출산이 주마등처럼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젠 어엿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 아직도 엄마라는 말이 낯설기만 한데….
 
 2006년 5월, 남편과 여행갈 준비에 들떠 있었다. 짐을 꾸리고 있을 때 하나의 조그만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임신 진단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약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한 나는 두 줄의 선명한 선을 보았다. 순간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제서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기쁨과 걱정이 교차되는 순간 남편을 불렀다. `이번에는 꼭 예쁜 아기를 품에 안아 봤으면…` `혹여 옛날의 일들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남편이 다가왔고, 난 그에게 시약결과를 불쑥 내보였다. 남편의 표정이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굳어짐을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그도 분명히 임신의 기쁨보다는 옛날의 아픔들이 먼저 떠올랐으리라.
 
우리는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우선 동네 개인병원을 방문했다.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마치고 재차 임신임을 확인한 후 우리는 `제발, 하느님 이번만은…`하는 간절함을 안고 의사의 권고로 계획된 여행을 취소하고 그 순간부터 환자 아닌 환자가 되어 모든 일을 다 접고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남들 다하는 결혼, 임신, 출산에 그리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아픔과 무서움들이 있었기에 그 평범함이 너무나 부러웠고 가장 큰 소원이었다. 꼼짝 않고 누워서 먹는 것, 화장실, 씻는 것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고통보다 아이를 잃게 되는 아픔을 겪을까봐 가슴은 불안으로 두근대고, 무서운 잡념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니까 처음 나에게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준 것이 벌써 9년 전인가보다.
 
 2000년 3월 임신임을 알았다. 결혼 후 오랫동안 아기가 없던 우리 부부는 더 없이 행복했고 부모가 된다는 단 꿈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임신기간 동안 순간순간 복부가 뻐근함을 느꼈지만, 배에서 벌써 발차기를 하는 아기의 몸짓을 느끼며 마냥 신기해 하면서 동시에 이미 아기에 대한 정이 제법 생겨갈 무렵, 정기진단차 방문한 병원에서 자궁문이 약간 열렸으니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어떻게 병원 문을 열고 나왔는지, 집은 어떻게 찾아 왔는지 통 기억이 없다. 밤새 울며 잠 한숨 못잔 채 다음날 인하대병원을 찾았다. 겨우 임신 6개월이 막 넘은 시기,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었고 너무 무서웠다. 의사의 진찰 후 나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궁문이 어느 정도 열려있고 양막이 약간 빠져 나왔단다. 아기를 낳아야 한단다. 아기의 생존 가능성은 없단다. 진통도 한번 느끼지 못했는데 출생이라니, 이별이라니…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의사에게 울며 매달렸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 생애 그 때만큼 무서웠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우리 아기, 나만을 의지하는 우리 아기, 내가 포기하면 우리 아기는? 나에겐 태아가 아닌 어엿이 나와 함께 지내온 소중한 아기였고 사랑이었다.
 
남편 또한 아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나의 말에 동의했다. 가능성은 낮지만 우린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고 입원수속을 마쳤다. 혹여 있을 진통에 대비해 나는 분만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난 내가 자궁경부 무력증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런 경우 임신중기쯤 맥도널드 수술을 해야하는 것도 알았다. 빠져나온 양막을 다시 자궁 속으로 밀어넣기 위한 시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양수가 흐르게 되었다.
 양수가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서 내 복부를 통해서 공급하곤 했다. 바늘이 배를 뚫고 들어간다는 아픔보다는 아기가 그 바늘에 찔리지는 않을지, 혹여 양막이 터지는 건 아닐지, 감염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더 컸다. 검사와 시술로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났다. 똑바로 다리를 올리고 누워 옆으로 뒤척일 수조차 없이 1분을 10년인 듯 매초 매분을 버티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긴 나날이었다. 같은 분만실 다른 산모들의 진통소리와 태아의 심장소리가 너무나도 부러워 입술을 깨물며 울곤 했다.
 그렇게 힘든 날을 생사를 넘나드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며 버티고 있는데. 6개월 무렵 양수가 터져 흘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설상가상 주치의 선생님이 다른 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긴단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를 담당했던 그 선생님을 따라 다른 병원으로 같이 이동해 입원을 했다. 다른 병원으로 이동한지 3일 만에 진통이 왔다. 출산해야 한단다. 하지만 그 병원에는 미숙아를 돌볼 장비가 없단다.
 우린 다시 구급차로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보내졌다. 그곳 응급실에서는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파업 중이어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진료를 받았고 분만대에 오를 수 있었다. 아기가 거꾸로 있단다. 제왕절개수술을 받아야 한다며 마취가 시작되고 한참 후 눈을 뜨니 병실이다. 남편의 어두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아긴?" 나의 물음에 그는 대답을 망설인다. 설마?! 그때, 언니가 들어오고… "아기는 또 가질 수 있으니까 다음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모든 것이 정지된다. 눈물이 흘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수술 전까지 심장소리도 들었는데…. 뱃속에서 힘겹게 견뎌온 내 아기, 엄마에게 모든 걸 의지해온 그 가녀린 것.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나중에 의사가 와서 말한다. 아기가 염증에 감염되었다고. 분만 당시에 사망했다고. 불쌍하다. 너무 가엾다. 아기 고통이 온 몸에 전해지는 것 같아 목놓아 울고 또 울었다.
 
이건 내 죄 값이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었다. 첫 임신 때, 우린 너무 일찍 아기가 생겼고 남편과 나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공유산을 시켰다. 맞벌이를 하던 그때의 우리 상황에 아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뱃속의 아기가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이고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라는 생각을 왜 그땐 못 했을까. 그 후, 성당에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봤고 많은 꾸지람과 질타를 받았다. 그때서야 내가 너무나도 엄청난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인이었구나. 어리석게도 그때서야 지금의 내 시련은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죄 없는 우리 아기의 고통은? `내가 이렇게 아이 고통을 걱정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퇴원해서 아기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세상을 모두 잃은 듯했다.
 
이젠 혼자다.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불쌍하기만 한 우리 아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이들과 손잡고 길가는 엄마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된 건 바로 그날부터다. 나에겐 너무나 먼 행복이고 소망으로만 보였다.

<다음 호에 계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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