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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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호는 무조건적 사랑과 관심입니다

생명수호 체험수기 우수작(김선희 가타리나, 서울 봉천7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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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꽃들의 잔치가 순식간에 끝나버려 아쉬운 마음으로 봄을 살고 있다. 왜 저 꽃들은 금방 지는 것일까? 그저 한없이 피어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 떨어진 꽃잎조차 밟기 아까워 땅바닥 꽃잎 사이로 이리저리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10년을 꼼짝 못하고 다섯 뼘 침대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 생각에 괜시리 지는 꽃잎들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 본다.
 낙성대 지하철역 앞 중고서적에서 책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기다리느라 들어간 찻집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묵묵히 줄지어 서 있는 큰길가 가로수들이 오늘따라 애잔하게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 매연 속에서도 굳건히 견뎌내며 서 있는, 사정없이 가지쳐진 맨몸을 그대로 드러낸 볼품없는 모습에서 불현듯 그 누구보다도 몸집이 크고 강건했던 아버지의 옛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굵은 뼈대에 가죽만 남은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떠올리며 가로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가만히 파이팅을 보낸다.
 가물어 건조한 날에 봄비 촉촉이 내려 한결 상큼해진 봄바람과 봄햇살에 눈부시게 깨끗해진 하늘을 올려다 보며 방 한켠 창문을 통해 도화지 크기만큼만의 하늘을 볼 수밖에 없으면서도 생명이 있어 그나마라도 볼 수 있는 그것에 감사하는 아버지의 겸손한 마음이 생각나 별일 아닌 것에도 투정을 부리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아버지는 적극적 활동으로 한창 젊게 사는 노년의 표상을 보여주던 1999년 11월 중순, 67살 나이에 뇌경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그때 난 마흔이 넘은 나이에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해산을 2개월 정도 남겨둔 상태였다.
 남편은 일 때문에 서울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꼬불꼬불 강원도 화천에서 두 아이들만 데리고 살고 있었다. 내가 심한 충격을 받을까봐 동생들은 병원에서 아버지 장례를 준비하라는 가망 없는 말을 듣고서야 늦게 연락을 해서 정신없이 달랑 핸드백 하나, 두 아이들 양손에 꼭 잡고 겨우 서울행 막차를 타고 올라올 수 있었다.
 항상 건강하고 당당했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며 멀리 살고 있어서 자주 뵙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두 손 안에 간절히 묵주 쥐고 얼마나 울었던지….
 밤 11시 다 되어서 병원에 도착해보니 여러가지 호스에 온몸을 내맡긴 채 밑둥 잘린 고목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서 오로지 기계의 화면에 표시되는 숫자로 숨만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분명 아버지가 맞는데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두 손 꼭 쥐고 흔들며 아무리 크게 불러도 대답 없고 축 늘어지는 팔과 눈감고 누워있는 모습이 우리 아버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왜 우리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이래야 되나!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봉사를 그리 많이 하셨는데 왜?"

이런 섭섭한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잠시 뒤로 미루고 나는 동생들에게 응급실 담당 의사의 가망 없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돌아가시는 걸 기다릴 수 없으니 갈 수 있는 큰 병원 물색해 아버지를 옮기자고 하고 새벽에 큰 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다. 이 중환자실에서 무의식 세계와의 사투에서 의식을 찾기까지 이십여 일 가까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단 한 가지 살아만 나시기를 빌었다.
 성모님의 은총을 입어 기적적으로 의식이 깨어난 후 십여 일을 더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는 왼쪽 몸이 완전히 신경이 마비된 채 일반 병실로 올라 오셨다. 이 기막힌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본인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으시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우시기만 하셨다. 나는 차근차근 처음부터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드리며 아버지의 강건한 정신력 덕분에 이렇게 살아나신 것에 고맙고 감사하다고 거듭 말씀드렸다. 엄마를 비롯해 우리는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재활훈련도 하면 다시 전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잎새 같은 희망을 꿈꿨지만 일 년여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아버지에게는 1급 지체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표시가 따라 붙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생명수호에 대한 우리 가족의 노력은 10년이 된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쓰러지신 날 서울에 온 이후로 아이들과 남편과 그대로 친정집 아래층에 살게 됐다. 엄마 혼자서 아버지 수발을 감당하기에는 상황이 심각했고, 아무래도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아버지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한 살 손자와 네 살, 열네 살 두 손녀들의 재롱이 아버지에게는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다리가 됐다. 외할아버지를 사랑하는 아이들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일 년 이 년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 얼굴은 서서히 어린아이처럼 화색이 돌고 편안하고 천진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 귀한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계신다.
 막내 외손자 나이와 같은 10년이 된 지금은 오랫동안 누워 계시는 후유증과 벌써 70대 후반의 나이로 몸은 더 쇠약해져 더 움직이기 힘들게 되었어도 수발드는 엄마에게나 우리에게 항상 우스개 소리로 웃음을 먼저 건네고 작은 도움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아끼지 않으신다.
 "선희야, 내 다리 새 다리 다 되었지?"
 "아냐, 새보다는 조금 더 굵어."
 아버지 다리를 닦아 드릴 때마다 우리 부녀의 대화는 이렇게 먼저 시작하며 난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종달새가 된다. 사실 난 아버지께서 이리 편찮으신 몸이 된 다음 가난하고 소외된 노인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6년 전 쯤 우리 집 앞 고시원 건물 앞에 매일 나와서 거의 하루 종일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하루에도 몇 번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우리 집 아이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는데, 초겨울 무렵부터 안 보이셔서 궁금했지만 그저 어디 편찮으신 정도로만 생각하고 얼마 지나면 나오시겠거니 했다.

그러곤 한참을 지난 후 엄마가 혀를 끌끌 차시며 "요 옆 골목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셨대. 그동안 딸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갖다 드렸었는데 반찬을 가지고 가보니 돌아가신지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벌써 변을 당하셨다지 뭐니? 그 노인네 불쌍해서 어쩌니? 요즘 세상이 그렇다" 하신다.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햇볕 쪼이시던 쇠약한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고, 매일 그 외로운 방에서 홀로 사시면서 긴 밤을 홀로 지내시며 죽음까지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맞이하며 얼마나 쓸쓸함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못 견디게 죄스런 마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가… 그때 우리 아이들 머리 쓰다듬어주실 때 말벗이라도 해드릴걸…."

무관심 속에서 소중한 생명의 빛이 사그라진다는 사실이 나에게 부끄러운 마음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때부터 노인들은 나에게 예사롭지 않다. 길을 가다가 자유롭지 못한 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힘겹게 걷는 노인들을 바라보면 그분들이 무사히 걸어갈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떼지 못하고 종종 서 있곤



가톨릭평화신문  200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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