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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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살리라 (상)

제3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우수작(상, 정정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서울 목5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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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2007년 12월 10일 세례를 받았다. 햇수로는 3년차이지만 따져보면 아직 15개월 밖에 되지 않은 영아이며, 외짝교우 두 달간의 교리가 전부인 정말 부족한 신자다.
 "여기에 앉아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주님께서 부르심…"이라며 세례에 앞서 우리에게 하신 신부님 말씀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요즘 나는 부족한 교리와 지혜를 얻기 위해 매일미사 책과 평화신문을 꼼꼼이 읽고, 성경 백주간 모임에 참석해 자매님들과 묵상을 통한 기도를 드리며 "아무 말 말고 3년만 꾹 참고 다녀보라"는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또 한 가지의 작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아직 꼭지 덜 떨어진 새내기 신자다.
 사실 셋째를 임신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족정책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을 때였고, 남들은 그토록 어렵다는 임신이 나는 너무 자주 되는 바람에 정말이지 당혹해했다. 딸 둘을 키우는 상황에서 원치 않았던 세 번째 임신.
 뱃속 아이 또한 딸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남편이 자꾸만 병원을 가 보자고 하면 `딸이면 지우라고 할 텐데, 죽어도 병원에는 따라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아이 둘 쑥쑥 건강하게 잘 낳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 아프면 이야기 할게요"라고 불안에 떨며 답하게 했다.
 하지만 남편은 끈질기게 "요즘 세상에 아이 셋 줄줄이 달고 외출하는 집이 어딨냐? 다른 집 여자들은 깔끔하게 티 안내고 처리도 잘 하던데 넌 왜 못하냐?"라며 셋째 임신을 나무랐다.
 며칠 밤을 고민하다 병원을 찾기로 했다. 다음 날 남편이 건네준 병원비를 들고 퇴근 후 산부인과를 찾았다.
 하루 종일 병원에 가서 아이 지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처음 찾은 병원 안내 데스크에는 "원장 선생님 세미나 참석으로 오후 진료는 쉽니다"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갔다.
 거리를 헤매다 두 번째 병원을 찾아 들어섰다. 안내를 받아 수술대 위에 누웠고, 잠시 후 의사 선생님이 장갑을 끼고 다가왔다.
 난 거의 무의식적으로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만요! 제가… 오늘 가서 다시 생각해보고 올게요."
 의아해하는 주변 사람들 눈을 의식하지도 않은 채 엉엉 소리쳐 울면서 병원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이 아이는 제가 키울게요. 제 의료보험에 올리고-그 때 그 시절에는 두 명의 자녀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제가 벌어서 키울게요. 제발요…"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임신 3개월째에 접어들었다. 5살, 3살 딸 아이 둘을 건사하기도 바쁠 시기인데 입덧까지 심한 셋째를 갖고 보니 직장인 학교생활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1년을 휴직하기로 마음 먹었더니 휴직 서류에 임신진단서를 첨부하라고 했다. 그저 발길 닿는대로 찾아간 곳이 가톨릭병원이다. 나를 진단해 준 여의사는 세 번째 임신인 걸 정말 축하해주었다.
 "정말이지 장하세요. 전 아이가 하나인데 둘째 갖기가 두려워요. 병원이라는 곳이 일이 많아서 동료 의사들 피해주는 것도 있고 해서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을 도울 일이 없나요?"
 너무 친절한 의사의 말에 "보통 병으로 휴직하면 70퍼센트의 봉급이 나오는데… 건강해서 임신이 된 건데요 뭘…."
 의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의사는 진단서에 무어라 영어로 적기 시작했다.
 "제 의사생활에서 이런 오진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진단서를 건넸고, 난 그 진단서 덕분에 일 년 동안 세금 한 푼 떼지 않는 70퍼센트의 봉급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 아이는 복덩이에요. 저 먹을 것 다 챙겨가지고 나오잖아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하며 임신 내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성경 백주간 모임에서 묵상했던 부분이다. 야훼이레… `주님께서 그 때부터 날 지켜봐 주시고 늘 함께 하셨구나``수호천사를 보내 아이 생명을 지켜주셨구나` 생각하니 절로 무릎이 꿇어지고 엎드려 감사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남편은 체면을 중시하며 자랐던 집안사람답게 우리가 살던 아파트 광장 맞은편에 사는 직장 상사나 그 부인에게 임신이 알려지면 곤란하다며 장보러 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외출을 금지 당한 채 남편이 퇴근하면서 사다 주는 부식으로 만족하며 살아야만 했다.
 셋째는 입덧이 유독 심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정해져 있었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한 번 음식을 사 달라고 해서 맛있게 먹었는데, 남편은 음식값을 치르면서 "누가 보면 우리 집이 갑부인 줄 알겠다." 언감생심. 그 이후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달라는 말은 꺼내 볼 수도 없었다.
 달이 꽉 차 진통이 올 때까지 고집스레 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출산하고 나니 셋째는 건강한 아들이었다. 결혼 후 여태껏 한 번도 고맙다는 표현을 나에게 해 주지 않았던 무뚝뚝한 남편은 "수고했어. 정말 고맙다. 맞벌이 아내랑 살면서 자식 둘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했다"며 살가운 말을 건넸고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출산 후 딸이 일곱이었던 친정 엄마가 아들 손자를 키워주시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너무나도 감사했다. 친정 가까이 집을 옮기고 딸 둘까지 덤으로 6년 넘게 친정 엄마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셋째를 낳을 때까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남아선호 사상이 잔존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딸 둘 낳고 아들 낳았으니 나는 200점 엄마가 되었다. 동시에 아들은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렇게 늦게 막내아들 두었다고 감사하며 부지런히 세 아이 키우며, 직장인이자 아내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살았다.
 

 
▲ 삽화=권소현
 

셋째 아이가 7살이 되던 해, 몸이 무겁고 소화가 잘 되질 않아 내과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산부인과를 먼저 다녀오라 했다.
 "아뿔싸! 몸이 힘들었던 이유가 또 임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아이 한 명만 더 낳아 기르자"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의 임신 소식에 환호하며 좋아했다. "하늘이 내리신 고귀한 선물인데 당연히 낳아야지"하면서 말이다. 반대로 이번에는 내 생각이 달랐다. `최씨 문중에 시집와서 할 일 다 했어. 이제 나도 내 삶에 날개를 달으리라.`
 대학 동기들이 전문직인 장학사로 나가기 시작했고, 나 또한 장학사 시험에 응시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던 터다. 하지만 남편의 강한 권유를 거절할 수가 없었고, 나는 괴로운 심정을 친정 엄마에게 알렸다.
 "엄마! 나 임신이래. 어떡하지… 넷째지만 어떡해… 낳아야 할 것 같아."
 "네 손으로 아이들 셋 제대로 키웠다면 그 입으로 아이 또 낳는다는 말은 못할 것이야.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면서 친정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키워 줄 수 없음을 분명히



가톨릭평화신문  200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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