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감사하며 살리라(하)

제3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우수작(정정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서울 목5동본당)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지난 호에 이어

   교직에서 나를 다시 받아 주리라는 믿음이나 단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교원 정년 단축으로 교사 채용을 늘린다는 보도가 나에게는 한가닥 희망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부의 교원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공부했다. 첫 해 임용시험에는 떨어졌다. 젊은 예비 교사들의 실력은 대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교사 채용 인원도 극소수였다.
 또 한 해를 더 공부해야만 했을 때 세상을 더욱 깊이 배우게 됐다. 이제까지 학업, 직장, 결혼 등 모든 생활이 전반적으로 순탄했던 내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확신이 없는 공부를 하면서 꿈 속에서까지 나타나는 시험 스트레스를 경험해야만 했다.
 시험이 끝난 뒤 해방감과 행복감은 물론 공짜가 아니었다. 시험 준비기간이 길면 길수록, 시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들인 공이 크면 클수록 기쁨은 커지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인천에 발령받았다.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인천 임용을 선택하게 했으며, 가족 모두가 인천으로 올라왔다. 물론 자녀 양육과 교육은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남편은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하면서 사무실에서 가까운 명동성당을 찾아가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아마추어 가톨릭 남성합창단 울바우 단원이 돼 주님 찬양 노래를 불렀다.

난 그때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막내와 함께 남편 공연장마다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꽃다발을 날랐고, 사진 촬영에 바빴다.
 세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명동성당에서 치르는 남편 세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며, 대부님을 모신 저녁식사까지 흔쾌히 동행했다.(나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읽고 있는 중인데 파라오의 마음을 올곧게도 하시고, 마음을 열게도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란 부분을 읽으면서 깊게 묵상하고 기도드린 바 있다.)
 자녀교육 때문에 또 한 차례 서울로 이사했다. 고향을 떠나와서 아이들 키우느라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변변한 가을여행 아니 나들이조차도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만 도로변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의 무성한 잎사귀가 밝은 연두빛과 짙은 오렌지색과 검은 갈색으로 차차 물들어가는 것을 보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은행나무잎들을 보며 가을을 삭혔다.
 가을 단풍이 볼만한 곳이라는 대문짝만한 글귀와 호사스러운 단풍이 맑은 물과 어우러진 근사한 사진이 담겨져 있던 모 신문은 내 손에 구겨져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막내를 포함한 네 자녀 모두 나팔꽃이 연달아 폭죽 터트리듯 "하하" 웃으며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바쁜 넝쿨이 되어 `앞으로 앞으로` 칭칭 감으며 나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여 온갖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레지오 활동을 다녀오더니, 외짝 교우반이란 게 있는데 두 달 교리공부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아이 넷 건사하랴 직장 생활에 뒤늦은 학업까지 병행하고 있던 참이라 시간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달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남편을 향하여 고개 내밀며 말했다.
 "저 그거 할래요. 외짝 교우반 그거…."
 이렇게 주님께서 날 부르셨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할 일인가.
 교리 마지막 날 교리시간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신부님께서는 일반신자가 지켜야 할 몇 가지 일들을 열심히 설명하셨고, 난 그 내용을 메모하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고 작년 겨울방학 동안 평일미사에 참례해 부족했던 교리뿐만 아니라 마음과 몸, 영혼의 건강을 채워갈 수 있음을 기뻐했다.
 올 봄 큰 아이가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성가정 목5동성당`에서 자녀들 모두 주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십사 열렬히 기도드린다.
 남들하고 다르게 셋째와 넷째까지를 허락해 주시고, 내가 하느님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그때부터 일찍이 보살펴 주셨으며 주님의 길로 오묘히 인도해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 지금 이 순간 "이제는 주님 꼭 붙들고 끝까지 살게 해달라"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려본다.
 그러면서 `위상(位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위상`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말한다. 난 위상이란 것을 다시 생각했다. 현재의 연약한 나를 잘 받아들이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비상하는 꿈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주하지 않고 일어서는 용기 말이다.
 얼마 전 피겨선수 김연아가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우리나라의 위상을 온 세계에 아주 힘차게 떨쳤다. 또한 김연아가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는 온 누리에 주님의 은총을, 주님의 자랑스러운 영예를 펼쳐보인 것이었다. 보이는 위상을 떨친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은 위상이란 것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내 마음대로 보이지 않는 위상을 정의해 본다. 아이 넷의 엄마, 학교 아이들의 선생님, 남편의 아내. 이 모든 일들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나의 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사랑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고 행하련다.
 나는 이제 더욱 절실해졌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보이지 않는 위상이 펼칠 맥박소리에 귀를 예민하게 정착시키고 싶다. 맑고 푸르게 마음을 닦고 하늘을 바라다본다.
 자랑스러운 금메달을 목에 건 영예로운 선수처럼, 내 환경을 너끈히 뛰어 넘을 수 있는 갈매기 리빙스턴 조나단처럼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날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늘과 바람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9-07-0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0

1코린 12장 8절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