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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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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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해민
그림=권소현 


안개의 꼬리는 마을의 경계까지 삼실처럼 흩어져 있었다. 마을을 싸고도는 물길 위로 철로가 얹어져 있었다. 안개가 땅 위에 풀었던 제 머리채를 서서히 거두어들이고 나면 석탄열차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찌그덕 찌그덕 열차는 여차하면 철로를 이탈해 수장(水葬)이라도 될 듯 늘 아슬아슬했다. 숨을 쉴 때마다 뱉어내는 검누른 연기는 몇 가닥 남아 폴폴대는 하얀 머리카락을 삼켜대며 위태롭게 모퉁이를 돌았다. 조임이 느슨해진 괄약근의 노인네마냥 열차는 간혹 조개탄이 섞인 검은 가루를 주르륵 흘리며, 삼 뭉치같이 누렇게 엉킨 꼬리를 군데군데 뭉텅뭉텅 잘라놓고 내달렸다.

젊을 때부터 속앓이병을 달고 살아온 외할머니는 손이 잠시라도 일을 놓고 있을라치면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는 듯 쓸어내렸다. 그래도 체기가 좀체 잦아들지 않으면 말린 무화과 같은 입술을 오물대며 소다가루를 털어 넣었다. 남들같이 끼니를 들였다간 속이 견뎌 낼 재간이 없다며 외할머니는 석탄열차의 기적소리에 맞춰 두 끼의 식사만 했다. “옛부텀 아덜 밥상은 누버서 받꼬 사우 밥상은 서서 받는다 캣따.” 외할머니는 긴 한숨 끝에 으레 잦아드는 탄식을 했다.

“학가산 소낭구에 해가 걸리도 전짓불을 써야 천지 구분을 하이. 공여히 댐은 맨들어가꼬. 노상 백태 낀 거 맹키로 멀쩡한 사램을 앉은자리서 눈 빙신을 맹근기지. 늘근기이 이런 소리 자꾸 하믄 두 그릇 밥도 아꿉다칼지 모르지만서두, 그 많은 집하고 전답을 하루아침에 수장을 씨겠으이. 이기이기, 암만캐도 순순치는 안을끼라. 산 제물이라도 바치라 칼끼라. 가마이 있어바라 내 말이 어데 틀리능가.”


챠르르 챠르르, 귓결을 간질이며 물살이 갈라진 것은

내가 노를젓듯이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외할머니는 삼 껍질처럼 마르고 벌겋게 굳은살이 박인 앙상한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마당까지 주둔한 안개를 향해 혀를 차곤 했다. 삼실을 얹은 것처럼 가늘고 하얀 머리카락 때문인지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제물이 바쳐질 날을 예언하는 무당의 주술처럼 음산했다. 체머리까지 흔들며 중얼댈 때는 섬뜩해지는 게 누에알만 한 소름까지 돋았다.

음력 4월 그믐이 지나면, 철커덕 철커덕 키익 키익 베틀질 소리가 담장을 넘고 집집마다 빨랫줄에 치렁치렁 삼실 타래를 널어 말렸다. 우리는 땅에 닿을락 말락 널린 실타래 사이를 옮겨 다니며 숨바꼭질을 했다. 꼬옥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오인다, 술래는 이름 모를 망자의 수의로 태어날 실타래 사이를 명부를 들고 호명하는 저승사자처럼 헤집고 다녔다.

계집애들은 매번 중도에 놀이를 관두고 저희끼리 어디론가 몰려갔다. 울타리 흉내를 내느라 유리병을 박아놓은 화단에 닭 벼슬 닮은 맨드라미가 꽂혀 있는 예배당 마당으로 계집애들이 봉숭아 씨처럼 달려가고 나면 우리는 담배건조장으로 몰려갔다. 애초에 벌레가 얼금숨숨 갉아 먹었거나 건조과정에서 색이 잘못 빠져 하위등급도 못 매겨질 잎담배가 버려져 있었다. 서둘러 앞 춤이 불룩해지도록 주워 넣은 우리는 공범자가 되기 위해 은밀하고 익숙한 눈빛을 교환한 다음 외딴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떠난 지 오랜 집의 뒤란에는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기왓장이 주저앉고 깨진 옹기 옆에 똥이 검게 말라 뒹굴었다. 여기저기 담배꽁초와 깨진 술병이 수북이 널려 있고, 기왓장 사이에는 성냥개비가 제법 들어 있는 성냥갑도 몇 개 들어 있었다. 우리는 감나무 아래에 불쏘시개 모양으로 머리를 조아린 채 잎담배 두 장을 겹쳐 잘게 돌돌 말았다. 그리고는 마른 감꽃을 뭉개고 앉아 성냥머리를 화약딱지에다 마구 그어댔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복식호흡을 하듯 들숨날숨을 반복하며 캑캑 댔다. 문수는 옹기 안에 비스듬히 누워서 일부러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더니 이내 매운 연기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도 감나무도 아이들의 얼굴도 전부 노오란 게 언젠가 술지게미를 받아먹었을 때처럼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쿵쾅댔다.

잡은 자리에서 왕소금을 뿌려 절인 고등어구이는 온 식구가 좋아했지만, 삼 껍질을 벗기느라 앞니가 성치 않은 외할머니가 특히 즐기는 반찬이었다.

“에미야, 은제 간고딩어를 다 삿뜨노? 하이코야 노릿노릿하이 잘도 꿉었네.”

밥상에 간고등어 구이가 오르면 외할머니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피었다. 장에 가면 언제든 살 수 있는 게 간고등어였다. 그런데도 효심 지극한 자식이 산속을 헤매어 구해온 산삼이라도 되는 양 흐뭇해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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