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신춘문예당선작- 소설 향수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갑자기 갈대숲에서 뛰쳐나온 그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손은 그림자놀이라도 하는 듯 독특한 손 모양을 한 채 허공에 박혀 있었고 나는 어찌할지 몰라 어설프게 웃기만 했다. 순간 내 웃음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자전거 페달에 힘을 가해 재빨리 그를 지나쳤다. 휴우 무슨 짓이람. 나는 어느 정도 멀어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히뜩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한 그루 미루나무마냥 두 손을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다시 페달에 힘을 가했지만 한참을 지나와서도 여전히 뒤통수에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시선 탓에 먼지를 털 듯 뒷머리를 훌훌 털어내야 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오레건 주립대(University of Oregon) 를 방문했을 때 낯선 이국 캠퍼스의 풍경 속에서 보았던 첫 한국인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잔디밭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괴상한 외모는 부랑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 떨어진 청바지와 낡은 신발 날씨에 어울리지 않던 검붉은 색의 두꺼운 가죽 자켓 그리고 놀랍게도 자켓 가슴팍엔 때 묻은 작은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만약 그의 외모가 그렇게 엉망만 아니었다면 당시 한국의 모든 것에 굶주려 있던 나로서는 너무나 큰 반가움에 그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국인입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를 외면했고 그렇게 그와의 첫 만남을 내 쪽에서의 일방적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조금씩 한국 유학생들을 알아갈 때쯤 나는 한 선배에게 그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도 처음엔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다들 잘 모르더라고. 어떤 친구가 한국인 입양아라고 하던데 왜?

  아…아뇨. 그냥 저도 궁금해서요.

 선배에게서도 그다지 시원스런 답을 얻진 못했지만 그가 입양아일 거라는 추측에 왠지 그의 가슴팍에 달려 있던 태극기가 이해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태어난 조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정작 한국에서 살아온 나는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행동을 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태극기에 대한 그러한.
    어 ?싸움 났나 보다.
 같이 걷던 일본인 친구가 도서관 옆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앞서갔고 나도 이내 친구를 따라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곳엔 이미 싸움이 끝났는지 백인 한 명이 불쾌한 표정으로 주먹에 묻어 있는 피를 다른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바닥엔 한 동양인이 얼굴을 땅에 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마치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동양인은 잠시 후에야 어깨를 들썩거리며 가까스로 일어났고 순간 나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발음 정확히 태권도 라고 외치며 백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빠악 그의 달려듬과 동시에 얼굴뼈가 부닥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고 백인의 주먹은 도끼질을 하듯 위에서 아래로 여러 차례 그의 얼굴을 찍어 내렸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 속에서 나는 남자의 가슴에 달린 선명한 태극기를 보았다. 바로 내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봤던 한국인 그였던 것이다. 이후로도 몇 번인가 그는 태권도 를 외치며 달려들었는데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젠장…. 순간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덤벼드는 그의 처참함을 보며 웃는 나의 잔인함에 내 표정은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싸움이 아니라 코미디 프로를 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처럼 웃긴 장면도 없을 터였다. 덩치가 산만한 백인과 비쩍 마르고 조그마한 동양인의 싸움에다 한 명은 연신 맞으면서도 태권도 를 외치며 달려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학교 쎄이프티(safety) 가 와서 싸움을 말렸고 그들이 연행된 뒤에야 나와 일본인 친구는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태권도가 한국 무술 아닌가? 저 사람 한국 사람이야?

 일본인 친구 말에 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아닐 거야 라고 간단히 대답하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여전히 내 마음속엔 그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싸움 이후 그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폭력사건은 상당히 엄하게 다루어지는 편이라 만약 그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면 그는 얼마간 유치장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가느다란 관심의 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나는 일상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의 존재는 내 속에서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잊혔던 그가 느닷없이 길가 갈대숲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더구나 나를 향해 알지 못할 수신호를 보내며 웃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은 극적인 조금은 신비스런 그의 등장은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 충분한 긴장감을 주었다. 특히 나를 알 리 없다고 여겼던 터라 적잖게 그의 낯선 행동과 수신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일까. 내 기억 속 풍경엔 오래도록 그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들 사이에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든 손을 하늘 높이 올린 무표정한 허수아비처럼.  
 37번 버스는 나만의 버스라 할 만했다. 내가 타는 곳이 버스 출발지이자 종착역이기도 해서 종종 버스의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이 나였던 것이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서너 명되는 사람들이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차가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질감이 느껴질 정도의 단단한 고요를 깨뜨리기가 무안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버스 뒷좌석에 가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았고 늦은 밤 오레건 주립대의 근사한 야경이 내 눈동자 위로 천천히 풀려갔다. 풍성한 자작나무의 이파리들이 가로등 아래에서 바람과 함께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고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자드락 땅엔 지면패랭이의 실루엣이 실바람을 타고 바닥 위로 너울대고 있었다. 그 너머로 학교 졸업생인 나이키 사장이 지어줬다는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나이트 도서관이 나의 시간관념을 휘젓고 있었다. 캠퍼스의 아름다운 풍경에 망연해진 사이 나는 어디선가 풍기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고 언제 왔는지 버스 출구 바로 뒷좌석에 그가 앉아 있었다. 분명 그 야릇한 악취는 그의 것이 틀림없는 듯 했고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뜩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나도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미간을 피며 그의 괴상스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깡그리 밀어버린 옆머리 그리고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일자로 곧게 자란 까만 머리털이 마치 옛날 몽고족이나 인디언을 연상시켰다. 어울리지도 않는 링 모양의 투박하고 큼직한 귀걸이는 그 무게 때문에 귀가 끔찍할 정도로 쳐져 있었고 귓불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위기감에 숨을 골라야 할 정도였다. 그런 그의 특이한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돌아다보는 ?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5-01-0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0

1테살 5장 18절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