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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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서울대교구 일반병원사목부 10주년 수기공모 당선작

‘내가 떠나는 날 함께해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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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복씨.
 

오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참으로 좋은 탈렌트를 주셨다. 환자와 만남 가운데 오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감을 이용해 환자의 사소한 변화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내가 방문하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암 환자들로 장기간 투병생활 중이거나 죽음을 앞둔 이들이다. 환자를 만나러 갈 때는 늘 떨림과 설렘이 공존한다. 오늘은 어떤 모습의 환자를 만날까, 반응은 어떨까, 거부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환자를 만나는 순간 나의 후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이 모든 걱정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하겠다.’

나의 오감은 환자와 그 주변을 관찰하는데 신속하게 반응한다. 환자와의 대화는 삶의 여정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환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나누고, 공유하고, 들어주고, 지지하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심어주는 일은 참으로 행복하다. 더구나 내가 환자에게 교리를 전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하다.

병원에서 활동하며 많은 환자들과 만나고 헤어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별이 있다. 29세 미혼여성이었던 말기 암환자와의 이야기다. 직접 만나보니, 너무나 여리고 어려 보였다. 말기 암환자라 하기에는 너무 해맑았다. 교리 1~2시간은 환자, 보호자와의 대화로 만남을 이어갔다. 환자는 대학 졸업 후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1년 전 난소암 판정을 받았고, 여러 차례 수술에도 대장, 위 등으로 점차 전이됐지만 힘든 투병생활에도 희망을 갖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환자는 교리도 잘 듣고, 이해력도 우수했다. 세례를 받던 날, 환자와 보호자를 비롯한 함께한 이들은 모두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세례 후에도 우리는 동행자로서의 만남을 이어갔다. 환자는 자신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를 해줬다. 그중 가족의 아픔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사연을 말할 때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성격이 강한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어머니이며, 자식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따라와 주길 바랐다. 환자도 홀로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 없어 혼자 가슴에 묻어두기만 했다. 환자는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환자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만났다. 환자의 어머니는 봉사자인 나에게도 산처럼 높아보였다. 원목실 수녀님과 신부님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풀어나갔다. 어머니는 무척 당황하고 역정도 냈지만 차츰 환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며칠 후 환자와 어머니는 눈물로 화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환자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평화로워 보였다. 불안하고 초초한 것은 오히려 나와 가족들이었다.

어느 날 환자는 나에게 웃으며 “내가 떠나는 날 함께 해주실래요?” 라고 부탁했다. 나는 “초대만 해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배웅해 줄게요” 라고 답했다.

환자가 떠날 준비를 시작하면서 원목 신부님께서 자주 환자를 방문해 성체를 모시게 했다. 환자는 수녀님, 사무장님의 사랑을 받으며 고통 속에도 행복해했다.

어느 이른 아침, 환자 보호자로부터 환자가 떠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환자에게 가보니 환자는 힘든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환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며 빙그레 웃어줬다. 나도 살며시 안아주며 “나도 만나서 행복했어요. 사랑해요” 하며 빙그레 웃었다. 성체를 모신 환자는 너무 힘이 든다고 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환자를 안아주며 이제 안심하고 자도 된다고 말해주자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게 긴 여행을 떠났다.


박윤복(헬레나·삼성서울병원 천주교 원목실 교리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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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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