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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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내가 기억하는 김수환 추기경 - 추기경과 40년 인연 신치구씨

''모든 이 한결같이 대하는 모습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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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님은…

대교구장 맡아 불면증 겪을 때
산속 부대 찾아 심신 달래고

강론 등 모든 원고 손수 쓰며
이면지 활용 등 절약 생활화

사회 고비 때마다 입바른 소리
평생 ‘소외된 이웃 사랑’ 실천


신치구 (벨라도·77) 전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소장은 연구소 설립을 통해 평신도의 신앙심 고취와 교회 쇄신에 일익을 담당해온 이다. 김수환 추기경과는 40여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친분을 이어왔으며, 무엇보다 ‘김수환 추기경 전집’ 발간도 주관한 바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한 각종 책자 발간을 통해 그의 삶과 영성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신씨의 기억 안에 있는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본다.

- 첫 만남
김수환 추기경님. 내가 아는 추기경의 모습 대부분은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너무 잘 알려져 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추기경님께 마지막 인사를 전하자 문득 그분과의 첫만남이 떠올랐다.
김수환 추기경과 처음 만난 때는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종단 부총재였던 추기경님의 형님인 김동환 신부님의 권유로 가톨릭신문사(당시 가톨릭시보사)를 방문했다. 그때 만난 신문사 사장이 바로 김동환 신부님의 동생인 김수환 신부님이었다.
1983년 내가 육군본부 참모부장을 맡았을 때부터는 더욱 자주 추기경님을 뵙게 됐다. 온 가족이 늘 반기는 손님 중의 하나였다. 나와는 꼭 10년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우리의 친교 사이에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산속 부대를 방문하시던 추기경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서 과중한 업무에 치여 불면증까지 겪으셨던 그분은 산속에서 가끔 숙면을 취하곤 하셨다.
- 소탈한 인품에 매료
추기경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는 그분의 삶과 생애를 연구하고 싶어졌다.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 모두가 그분의 내면을 더욱 폭넓게 알길 기대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추기경 전집을 펴냈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내가 장교로 재직하던 내내 추기경님을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이 있었다. 그분은 장교들을 만날 때나 병사들을 만날 때나 그 누구를 만날 때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누구하고나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에게 자신을 맡기는 모습에서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더욱 많은 이들이 추기경님을 알기 바랐다.
솔직히 김추기경의 삶과 영성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된 것은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를 운영하면서다. 나는 순수하게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다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펼치기 위해 교구 산하가 아닌 독립적인 연구소를 열었다. 추기경의 말씀과 삶으로 엮은 책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등이 있다.

- 추기경 전집 발간
특히 추기경님의 서품 50주년과 팔순을 기념한 2001년에는 18권에 이르는 전집을 발간했다. 이 전집에는 김추기경님이 그동안 발표한 각종 교서와 강론, 대담과 강의 자료 등이 총망라됐다.
하지만 추기경님 본인은 전집을 내는 것을 끝끝내 반대하셨다. 너무 반대가 심해 설득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처음엔 서울대교구에서 책을 낸다면 나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교구장 재직 기간 동안 교구 차원에서는 책이 나오질 못했고, 추기경님이 은퇴하신 98년부터 내가 작업을 추진했다.
전집을 내면서 나는 두 번 놀랐다. 먼저 지금까지 매주 강론은 물론 각종 피정이나 특강 원고, 축사나 인사말 등등 모든 원고를 작성하는 부지런함이었다. 게다가 모든 원고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써왔다는 것이다. 어떤 해의 원고는 150편을 넘어섰다. 매년 같은 전례력을 지내면 지난 원고를 참고할 만도 한데, 한주도 거르지 않고 쓰셨다.
그렇게 쌓여서 내 손으로 전달된 것만 대략 3000편 정도였다. 교구장 재직 시절 분실된 것도 많다고 하니 정말 기록의 달인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그 원고 덕분에 전집을 낼 수 있었다. 또 추기경님이 종이를 사용한 모양새를 보면 꼭 앞뒤로 채워져 있었다. 항상 이면지를 재활용하고, 원고도 두번 세번 새로 쓰시는 법이 없었다. 내용 수정이 필요하면 쪽지를 붙여가면서 덧붙이셨다. 그만큼 계획적이고 정도를 벗어나는 사고를 해온 흔적이 아닐까 싶다.

- 내가 본 추기경
김추기경님은 잘 알려진 대로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중요한 고비에 부딪힐 때마다 김추기경의 말을 통해 사회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입바른 소리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로부터는 정치에 관여하는 종교인이라고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다. 그래도 김추기경님은 단 한번도 소신을 굽힌 바가 없다.
나도 좀 심하게 놀란 일이 있었는데, 바로 박대통령 장례식에서였다. 당시 김추기경은 천주교 대표로 조사를 했는데 “죄인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을 용감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을 모욕했다고 여길 지도 모르는 그런 발언은 어디론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인 일로 기억한다.
그래도 김추기경님의 말이 늘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대단히 멋진 말을 해서라기보다는 항상 현실 안에서, 솔직히 이야기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추기경님이 늘 강조하신 말씀의 주제는 ‘소외된 이들’이었다. 둘째는 ‘정직하라’였다. 사랑하라는 말은 거의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셨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 귀하지 않은 것이 없을 듯하다.
특히 내가 아는 김추기경님은 사제들에게는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려 하셨던 분이었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속에서는 잘못 알려진 것도 많은 듯하다. 추기경이라는 지위 때문에 신부님들 스스로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지 않을까.
전집을 내면서 보니 김추기경님 집무실에 가장 많이 드나드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비서실 일지를 봐도 특별히 출입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 또한 추기경님이 불러서 간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거절한 적은 없으셨다.
지난 몇 개월간 병원에 누워계신 추기경님을 뵐 때면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실 추기경님은 자기 관리가 너무 철저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할 정도였다.
김수환 추기경님. 내 마음만 같아선 반신불수로 누워 계셔도 우리 곁에만 계셔주시길 바랐다. 함께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분이셨다.
안팎으로 어려운 이 시기, 추기경님이 국민들을 직접 대하셨으면 어떤 호소를 하셨을까.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그리운 시간이다.

사진설명
▲신치구씨 가족과 함께 설악산을 등반하는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 군장교단과 김수환 추기경 등이 동해 최북단 철책선에서 북녘땅을 보며 기념촬영했다.
▲1985년 2월 12일 신치구씨가 제3군단 군단장 시절 공관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신치구씨의 사무실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



가톨릭신문  20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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