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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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사진으로 보는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교회 -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 긋고 떠나

온 국민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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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별, 김수환 추기경은 역사적 순간 그 어느 곳에나 함께 했다.

교회를 넘어 사회로, 사회를 넘어 세계와 호흡했다. 격동의 세월에 정의와 사랑의 획을 그었던 김 추기경. 우리는 그와 동시간대를 살며 희로애락을 함께 느꼈음에 행복하다.

◎…1969년 4월 28일 최초 추기경 탄생

“교황 바오로 6세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떼파노·47) 대주교를 추기경(카르디날)으로 임명, 1백 92년의 한국교회사상 최대 영광의 좌를 한국에 부여했다.”(가톨릭시보 1969년 4월 6일자 1면 중에서)

한국 교회의 추기경이 최초 탄생했다. 교황의 자문이자 교황 선거권 및 피선거권과 제성성 간 관청의 장관 및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 새 추기경을 축하하기 위해 공항에는 ‘환영,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됐다. 김 추기경은 당시 로마 추기경 특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박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회의 참석을 포기하고 귀국, 11월 3일 중앙청광장에서 고별의식을 집전했다.

김 추기경은 “우리 모두가 이 분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의롭고 밝은 국가 건설을 위해 한마음한뜻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에서 국민들을 다독이고 진정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던 추기경은 우리의 큰 ‘나무’였다.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103위 성인 탄생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하나의 분수령을 이룰 때, 김 추기경도 함께 기뻐했다.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여의도 광장에서 기념대회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가진 것이다.

당시 광장에 1백만 명이 운집할 만큼 한국교회사에 방점을 찍었던 이날 김 추기경과 참가자들은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본받고 진리의 증거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1989년 10월 8일 세계 성체대회

한국 교회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에도 김 추기경은 함께 했다. 84년 한국 교회 2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 성체대회를 위해 재차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무엇보다도 성체대회에 북한 신자들이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는 “만약 그들이 왔더라면 우리 국민의 환영 뿐 아니라 교황 성하도 그들을 껴안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 8월 21일 안중근 의사 복권

김 추기경은 교회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84년 만에 안중근 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제도교회가 그를 단죄했던 사실을 공개사과 한 것이다.

김 추기경은 사제단과 함께 21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김 추기경은 “상상했던 이상의 일들이 저질러졌다”며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오를 당시 제도교회가 범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1998년 1월 12일 범 교회적 금 모으기

IMF 한파로 전국이 얼어붙던 시절, 김 추기경은 경제 살리기에도 동참했다. 각 종교단체 대표들과 외채 상환을 위한 금모으기에 참여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모범은 교회 안에 금모으기 운동을 일파만파 확산시켰다.

서울대교구 명동본당과 서초동본당은 2월 8일 하룻동안 1천3백여 신자들의 동참 속에 총 6.19kg의 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솔선수범을 통해 장롱 속에 깊숙이 묻어뒀던 소중한 금붙이들은 모두 꺼내졌고 이는 국가 경제 위기 극복에 큰 힘이 됐다.

◎…1998년 5월 30일 은퇴

격동의 근현대사를 최후의 양심의 보루로서, 한국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안에서 가장 높은 존경을 받았던 김추기경은 5월 30일자로 은퇴했다.

그의 송별미사 강론은 ‘저는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한다’였다. 이어 그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 3장에서 바친 기도를 인용해 교우들과 하느님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그는 한국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밝혀온 큰 횃불이었다. ‘용기있는 발언’과 ‘중용의 침묵’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아온 것이다. 명동을 떠나며 교우들에게 흔드는 그의 손이 아쉽기만 하다.

◎…2004년 3월 11일 범국민 생명존중운동본부 출범

은퇴 후에도 김 추기경의 행보는 활발했다.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춰 출범한 범국민생명존중운동본부에 발기인으로 참석한 것이다.

그는 ‘함께 다짐하는 말씀’을 통해 “인간 존중과 사랑이 없는 곳에는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없다”며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올바른 길로 이끄는 생명운동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생명존중의 ‘꽃씨’를 나누고 있는 그의 손길이 따뜻하다.

◎…2005년 5월 20일 사형폐지운동 지속적 참여

사형폐지운동의 태동기부터 적극 참여했던 김 추기경은 은퇴 후에도 사형반대에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날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을 모아주었던 것은 그의 지속적 요청과 탄원이었다.

공식, 비공식적 자리에서 수없이 사형폐지를 주장해온 그는 사형수들의 사면과 감형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낸 일도 여러 번이었다. 그는 2005년 유영철씨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3명이나 잃고 고통 받는 고정원씨를 만나 축복하기도 했다.

김추기경은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 (마태 5, 38~45)라는 말 대신 새로운 법을 세우셨다. 만약 남의 눈을 빼앗은 자에게 그 눈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법을 만든다면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형폐지를 강력히 촉구했다.

◎…2005년 10월 9일 배아줄기세포 반대

가톨릭신문사 사장 이창영 신부와 만난 김 추기경은 ‘배아줄기세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내비쳤다. ‘이 시대의 큰 어른’으로서 어지러운 사회에 명쾌한 답을 던진 것이다.

그는 대담 중 “한국 교회 안에서 많은 의견들이 누차 알려져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다”면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분명한 원칙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배아줄기를 파괴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올바르지 않으며 단연코 중단돼야 한다고 사회의 도덕성 부재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2006년 3월 24일 정진석 추기경 서임

한국에 두 번째 추기경이 탄생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김 추기경은 정진석 추기경의 서임에 기뻐하며 손을 잡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새 추기경님의 이끄심으로 교구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발전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2007년 4월 1일 가톨릭신문 80주년

한국 교회 언론의 효시, 가톨릭신문의 80주년에도 김 추기경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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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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