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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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신문

''12대 사장 재직, 사제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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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기자·영업사원 1인 3역…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외신 받아 밤새 번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식 전해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64년 6월부터 1966년 5월까지 2년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 추기경은 본지 인터뷰에서 “가톨릭신문사에서 일했던 시간은 평생 사제생활 중 가장 투철한 사명감과 기쁨으로 투신한 시기였다”고 고백하며 가톨릭신문사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저는 신문사 사장이 되기 전부터 애독자였습니다. 특히 독일 유학 시절에는 가장 기다려지는 것이 고국에서 오는 편지와 가톨릭시보였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저의 사랑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각 교구의 소식이 더욱 기다려졌고, 받으면 즉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앞뒤 전면의 모든 기사를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지요. 그만큼 가톨릭시보를 사랑했습니다.”

독일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김 추기경은 가톨릭신문사 제12대 사장으로 부임, 사장과 기자, 영업사원으로 1인 3역을 하며 가톨릭신문을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질 정도로 열심히 뛰던 때가 가톨릭신문 재직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하루 24시간 중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비타민 같은 것으로 대신할 수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설과 기사작성은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중심으로 한 외신 번역, 신문보급, 수금, 광고에 이르기까지 동서분주하며 다방면에 힘을 쏟았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경우 통신사에 20만원(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을 주고 공의회 관련 기사를 모조리 받아 번역 게재하기도 했다.

“제가 재직하던 시기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기간 동안이었기에 이에 대한 소식을 동화통신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당시 동화통신이 수합한 종교에 관한 소식은 우리가 받지 않으면 대부분 그냥 버리는 것이 되어서 독점하다시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마감시간이 촉박한데 공의회 관련 기사와 사진이 없어 서울에 연락해 기사 전송을 부탁하고, 저는 직접 대구우체국에 가서 관련 사진 전송을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다행이 전송이 되어 제때에 신문에 게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김 추기경의 노력으로 가톨릭신문이 다양한 공의회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신문 부수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려운 재정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아내는 것은 또 다른 걸림돌이었다.

“당시 구독료는 개개인보다 본당과 교구를 상대로 했는데 저는 보급과 구독료를 수금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와 본당을 여러 차례 방문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떤 곳은 극진하게 잘 대해주고 또 다른 곳에서는 냉대와 푸대접이 심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떤 본당에서는 제가 사제복장을 한 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럽기도 했지요. 그러나 다시 제가 사제인 것을 알고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 일반 평신도들이 교회의 문턱을 넘기가 이처럼 힘들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신문 지면에는 광고가 거의 없었다. 김 추기경은 광고를 얻기 위해 전국을 다녔지만 허탕도 많이 치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신문 광고를 얻으러 서울 지역을 다니며 경험했던 일은 신문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다행이었어요.”

재임 당시 열악한 재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김 추기경은 직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쉼 없이 달렸다. 집 없는 직원의 경우 집을 장만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수입이 늘면 모든 이익을 직원들과 나누며 모두가 기쁘고 보람되게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집부, 영업부 모두 합쳐야 본사 직원이 10명도 채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만큼 모두 사랑으로 봉사했고, 열과 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냥 기계적으로 때가 되면 나오는 신문이 아니었고 인쇄되어 나오는 전 과정은 저희들의 피땀이 묻어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연히 함께 일하시는 분들도 그 뜻에 따라 마음을 다해 봉사함으로써 가족적인 분위기를 이어갔습니다.”

신문 한 장 한 장을 예술 작품 만드는 듯 한 정성으로 제작했다고 설명했던 김 추기경은 이렇게 열정을 다 쏟다보니 매번 신문이 인쇄돼 나오면 마치 작가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공들인 작품을 대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신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문을 보는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7, 8천부 밖에 되지 않던 신문 부수가 사장 신부 마지막 때는 대략 1만5000부 정도까지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부수로서는 상당한 부수라고 생각해요.”

이토록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신문사에 열과 성을 다해 투신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욕심이나 신문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홍보매체를 활용한 선교와 대 사회적으로 복음의 영향력을 넓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에 투영되길 바랐던 소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교회의 첫째가는 임무로 복음 선교를 꼽았다. 복음 선교를 위해서는 홍보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설명하며 가톨릭신문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매체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저는 가톨릭신문이 비록 종교 매체이지만 비신자도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교회 언론에 가장 강조한 것은 변화와 쇄신이었다. 또한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회 언론은 어떻게 변해야 하고 또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시대의 선구자요 교회의 인자한 어른이었던 추기경 김수환. 그분의 따듯하고 진심어린 충고가 귓전에 맴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낮은 자리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십시오. 가톨릭신문이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가 복음화 될 때까지 진리의 등불로 성장해 나가길 기원합니다.”

사진설명
▲1965년 9월 당시 사장이던 김 추기경과 논설위원들이 좌담회를 갖고 있다.
▲1953년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 대목구장 비서 시절.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판부장이 대구 대목구를 방문해 기념 촬영을 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재직시절 추기경의 신분증.
▲김수환 추기경과 20대(현재) 사장인 이창영 신부가 생명문제에 대한 특별대담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2007년 4월 대구 월드컵 경기장 특설무대에서 열린 가톨릭신문사 창간 80주년 자선음악회를 관람하고 있다.


이도경 기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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