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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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순교자의 후손'' 김수환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신앙 ‘사랑’으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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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되어라’ 어머니 간절한 기도 덕에 ‘장사꾼’ 꿈 접어
가난한 환경서 자라 어려운 신자들 몰래 돕는 사제로 성장

“서너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어머니는 읍내 공터 한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파셨지요. 이후로도 어머니는 평생 무거운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곧은 신앙심 만큼은 대단하셨지요. 어머니 무릎을 독차지하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성인전이나 성경을 읽어주시곤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신 것이며 할머니가 크나큰 희생으로 옥바라지를 하시던 일도 수없이 이야기해주셨지요.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가치관을 세울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생 동안 내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

지독히 가난했던 살림, 어린 마음에 불만이 자랄 법도 했지만 김수환의 뇌리에 또렷이 아로새겨진 기억은 “천국으로 보내주소서”라며 기도하던, “커서 신부가 되어라”라고 당부하던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 순교자 집안의 막내

김수환의 신앙은 핏줄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져왔다.

교회사 연구가들은 김수환의 친가 선조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던 충청도 연산지방은 이미 1790년대에 복음이 전파된 지역으로, 김수환의 집안도 일찍부터 천주교를 믿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고 밝힌 바 있다.

김수환의 조부(김요안·재적등본 상 이름)는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 때 순교한 독실한 신자였다. 조모(강말손)도 남편의 순교 이후에도 감옥에 갇힌 신자들이 배교하지 않도록 갖은 옥바라지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이들 부부의 순교신심은 아들인 김영석(요셉)에게 오롯이 이어졌다. 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살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떠돌았다. 1895년경 경상도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과 가까운 칠곡 장자골 옹기굴 신자촌에 정착, 서중하(마르티나)와 혼인한다. 이들의 혼인은 뮈텔 신부(후일 조선교구장 주교)와 김보록 신부(대구본당 첫 사제)의 중매로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서중하의 부친 즉 김수환의 외조부인 서용서 옹은 을해·정해박해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대구 지역에 신앙을 전파한 구교우였다. 대를 이어 독실한 신앙인으로 선 서중하도 오로지 믿음 안에서 성가정을 일구고 자식들에게 신앙을 전하기 시작했다.

1922년, 대구에서 출생. 김수환은 5남3녀(재적등본 상 4남3녀) 중 막내였다.

유년 시절엔 밤마다 1~2시간씩 기도를 바치는 어머니 옆에서 꾸벅꾸벅 졸며 뜻도 모른 채 기도문을 중얼댄 기억이 또렷하다. 그의 어머니는 초가삼간 옹색한 집에서도 공소를 열고 사제를 맞아들였던 독실한 신자였다. 어머니 기도 덕분인지 김수환과 그의 작은 형 김동환(가롤로)은 사제의 길을 걷는다.

김수환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었지만, 하느님께 한번 잡힌 발목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신부가 되기 싫어 꾀병을 부리던 철부지 소년, 일제 치하에서도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는 답안지를 서슴없이 내놓던 용감한 소년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다. 궁핍한 생활에 찌든 신자들을 도와주려 고해실에서 몰래몰래 구호기금을 전해주는 정 많은 사제가 됐다.

이후 43살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되고, 47살에 서울대교구장이, 48살에 추기경이 됐다. 특히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재직시절 동안에는 수면제가 없이 잠들지 못할 정도로 고뇌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선한 큰 어른으로서의 자태는 평생토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수환의 호(號)는 ‘옹기’다. 박해 시대 신자들의 생계와 복음 전파를 도운 수단이었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물론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 말이다.

■ 웃음 넘치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오랜 기간 할아버지로 불렸다. 그의 앞에 서면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받는’ 또한 ‘귀염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때론 친할아버지 같았고, 때론 친아버지 같았고, 때론 친아들 같았다.

사람은 마음속에 품은 것을 그대로 내놓게 마련이라 생각하는 대로, 바라보는 대로, 실천하는 대로 몸에 배이고 얼굴과 말에 드러난다. 김수환은 늘 웃음을 머금으며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전염시켰다. 게다가 마이크를 들면 대중가요 ‘사랑을 위하여’를, ‘애모’를, ‘만남’을 구성지게 불러 신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오가다 추기경인줄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저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라며 시치미를 떼는 능청스러움도,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극적인 승리를 거둔 장면에선 감격에 겨워 혼자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는 순수함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장면이 담긴 뉴스를 보며 눈물짓는 지극한 사랑도 모두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지난해 직접 그려 전시회에 기증한 드로잉의 제목을 ‘바보야’라고 지었다.

“인간으로서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든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로 바보지요.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가족들 안에서는 늘 ‘우애’를 강조했다.

명절이면 조카들과 조카손주들이 서울 혜화동 집무실에 모여들곤 했다. 조카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6명으로 늘어난 증손주들과 함께 합창도 하며 그는 항상 우애를 강조했다.

지난 2006년에는 조카 손자(큰누나의 증손자) 박준용 신부와 공동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적인 경험도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대를 이어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박신부에게는 할아버지로서, 선배 사제로서 당부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김수환은 스스로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이 죄 많은 ‘나’를, 이 부족한 ‘나’를, 이 못난 ‘나’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을 물러나면서 신자들에게 받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적 예물 앞에서 그가 밝힌 화답은 오래오래 회자된다.

“이 다음에 죽어 베드로 사도 앞에 나갔을 때 만일 베드로 사도께서 아직 천당에 올 때가 못되었으니 연옥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면 신자 여러분들이 오늘 제게 주신 이 영적 예물을 보여드려야겠네요.”

넘치도록 사랑을 주고,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던 ‘빨간 모자 할아버지’는 그렇게 ‘사랑’을 남겨놓고 떠났다.

사진설명
▲1993년 경북 군위군의 생가를 방문한 김추기경. 군위 생가는 추기경이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1944년 김추기경이 학병 입대 전 대구 성모당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추기경이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어머니 서중하 여사, 추기경의 오른쪽이 당시 신학생이었던 넷째 형 김동환 신부, 왼쪽이 셋째 형 김필수씨다.
▲김추기경의 셋째 형인 김필수씨가 1969년 동생의 추기경 서임 소식을 듣고 일본 방문



가톨릭신문  20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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