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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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인간 김수환은 □□다.

물질만능시대에 사랑만 알았던 ''진짜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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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연습 위해 토큰 들고 명동거리 나선 소박ㆍ단순한 성품
배고픈 행려자 무단 침입하자, 비서신부 통해 돈 쥐어 돌려보내
철거민과 가난한 이들 다녀간 후에는 "내가 은행이면 좋겠네…"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은퇴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김 추기경은 비서 수녀에게 뜬금없이 "버스 토큰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묻자 "나도 이제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며칠 뒤 "혼자 다녀올 데가 있다"며 토큰을 챙겨 회색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명동거리로 나갔다. 사람들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눌러 썼다. 추기경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는 터라 비서 수녀는 걱정스러워 몰래 뒤를 따랐다. 인파 속에서 추기경과 스친 행인들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었다.

 비서 수녀의 미행(?)을 눈치 챈 추기경은 돌아서서 "수녀가 졸졸 따라오니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잖아"라며 돌아가라고 했다. 추기경은 을지로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비서 수녀가 따라 타려고 하자 "집에 잘 찾아 들어갈테니까 걱정마라"며 끝내 돌려보냈다.

 추기경은 오후 늦게 돌아왔다. 행선지조차 몰라 하루종일 애태운 비서 수녀에게 "나 잘 다녀왔지?"라며 으쓱 뽐냈다. 추기경은 그날 한 신부의 노모(老母)를 찾아뵙고 왔다.

# `티코`면 어때?

 인간 김수환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1990년대 중반 경차 티코를 타고가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다. 대우자동차가 이를 재빠르게 광고에 이용했으나 신자들 항의로 3일 만에 중단했다.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됐던 `티코 사건`은 휴일에 우연찮게 일어났다.

 추기경은 자신을 방문한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들과 어디를 가려고 교구청 현관으로 나왔다. 계획에 없던 외출이었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쉬는 날이라 차편이 없었다. 비서실에서 운전기사를 급히 호출하려고 하자 추기경은 "요한(김형태 운전기사)이도 휴일에는 쉬어야지"라며 마당에 주차돼 있는 티코를 가리켰다. AFI 회원들이 타고온 차였다.

 추기경은 특별한 취미도 없었다. 짬이 나면 서울 근교 등산을 했으나 은퇴 이후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그마저도 그만뒀다. 교구장 시절에는 저녁식사 후 적적할 때면 명동성당 뒤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 가서 수녀들과 백(Bag) 게임을 하곤 했다. 주사위를 갖고 하는 윷놀이 비슷한 게임인데, 추기경 실력이 워낙 `고수`라 맞설 상대가 없었다.

 혜화동으로 이사와서도 비서 신부와 단 둘이 그 게임을 즐겼다. 추기경이 비
서 신부에게 "소화가 안 되네", "좀 쉴까?"하면 백 게임을 하자는 뜻이었다. 추기경이 한 평생 즐긴 취미가 있다면 백 게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 도둑 와도 훔쳐갈 게 없는 방

 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은 `부자`(교구법인의 모든 재산은 교구장 명의로 돼있다)였으나 인간 김수환은 가난했다. 그리고 마음은 늘 가난한 이들에게 가 있었다.

 추기경이 밤늦게 혜화동 숙소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을 때 행려자가 무단 침입한 적이 있다. 행려자는 "배가 고파서 왔으니 돈을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지갑은 물론 방에 1만 원 짜리 한 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난 수중에 돈이 없다.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면 비서 신부한테 갖고 내려가라고 하겠다"며 내려보냈다. 비서 신부가 돈을 조금 쥐어줘 돌려보냈다.

 이튿날 주교관 수위실과 비서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현관에 번호인식 자동키를 설치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무슨 일이 있겠느냐? 내가 시달려도 좋으니 자동키를 떼라"며 역정을 냈다. 하지만 비서실에서는 그 말에 따를 수가 없었다.

 물론 성무활동에 쓰라며 추기경에게 돈 봉투를 내미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예방객들이 선물도 많이 들고왔다. 하지만 그 돈과 선물은 대부분 AIDS 환자공동체ㆍ외국인노동자공동체ㆍ출소자공동체 등에 미사를 주례하러 갈 때 들고 갔다. 비서실에 문의해 통장에 돈이 있으면 "내가 그 돈을 갖고 뭐하겠느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재촉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쓸 줄을 몰랐다. 사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이라 쓸 데도 없었다.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초대와 호화로운 식사 초대가 겹칠 경우 항상 전자를 택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타고난 성격이다. 한 측근은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도 추기경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진정 기쁘게 만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식사준비ㆍ세탁물 정리ㆍ서류 정리 같은 일상적인 것들을 대부분 비서나 식복사 등 주위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런데도 "…를 어떻게 해달라"는 요청이나 "…를 왜 이렇게 해놓았냐"는 불평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주위 사람들 말이다.

 한 측근은 "인간이라면 불편한 게 없을 수 있겠느냐"며 "하지만 너무나 주장이 없으셔서 한 번은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보라고 말씀드릴까 생각도 해봤다"고 말했다.

# 남 모르는 고뇌의 순간 많아

 인간 김수환은 외로웠다.

 어머니 다음으로 혈육의 정이 깊었던 친형 김동한 신부 부음(1983년 선종)을 로마에서 들었을 때 "머리와 가슴이 텅비고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추기경은 한 달 뒤 로마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날, 대구로 내려가 혈육의 체취가 남아 있는 텅 빈 형님 방에서 홀로 잠을 잤다.

 또 잔정이 많았지만 친척들에게는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엄격했다. 교구장 시절에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을 아예 막았다.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온 친척을 쌀쌀맞게 돌려 보낸 적도 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느라 그런 것이다.

 추기경은 홀로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 무게 때문에 더욱 외로웠다.

 민주화운동으로 명동성당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1970~80년대, 추기경은 집무실에서 누구와 언짢은 이야기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늘 3층 성당으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홀로 십자가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주위 사람들이 꽤 많다.

 추기경은 간혹 "다들 나한테 와서 어렵고 힘든 얘기를 털어놓으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난 누구와 상의해야 하나?"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추기경이 도움을 청하거나 상의할 상대는 하느님 밖에 없었다. 철거민이나 소규모 복지시설 책임자 등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다녀간 뒤에는 "내가 은행이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 때문에 비서실은 방문자들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전화가 50통 걸려오면 40통은 부득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전화였다.

 언젠가 정계 거물급 인사 A씨가 추기경을 예방하기로 한 날이었다. 비서실에서 "일전에도



가톨릭평화신문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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