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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추기경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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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은 늘 온화한 미소로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 안았다. 가난한 옹기장수 막내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헤아렸다.

 또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는 `시대의 양심`으로 한 평생을 살았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김영석(요셉)과 서중하(마르티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가 조선말 무진박해 때 옥사(獄死)하고,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일찍 작고해 무척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8남매를 키웠다. 그는 곡마단이 들어온 읍내 공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팔던 어머니 모습을 유년시절 첫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행상을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큰 길에 나가 어머니가 넘어오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와 형님 김동한 신부는 큰 자리를 차지한다. 어머니가 신앙을 가르쳐 주었다면, 형님 김동한 신부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그리운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 준 존재다.

 그가 소신학교에 진학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뜻이었다. 성품이 곧고 신앙심이 독실했던 어머니는 두 아들(동한, 수환)을 훌륭한 사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에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신학교 시절, 신앙적으로 너무 순수해서 죄같지 않은 죄까지 낱낱이 고해신부에게 털어놓아야 안심이 되는 세심증을 앓기도 했다.

 불의 앞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은 신학교 시절부터 표출되기 시작했다. 일제 강압통치가 맹위를 떨치던 1940년대 초반 "황국신민으로서 일본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소감을 쓰라"는 수신(윤리)과목 시험지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이라고 써서 교장 신부에게 뺨을 얻어 맞은 일화는 유명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형 동한은 이런 동생을 보고 "신부가 되려고 하니, 독립운동가가 되려고 하니"라며 걱정했다. 일본 죠치(上智)대학 유학시절, 은사 게페르트(독일인) 신부가 수환을 각별히 아낀 이유도 그의 올곧은 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도병으로 전쟁터까지 다녀온 뒤 귀국해서 학업을 마무리 짓고 신부가 됐다. 첫 부임지 안동성당과 이어 부임한 김천성당과 성의중고교에서 보낸 4년여 세월은 그에게 꿀맛같은 시기였다. 그는 추기경이 된 뒤에도 일선 사목현장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한 추억을 두고 두고 화제에 올렸다.

 "50년 넘는 성직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으면 "신자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본당신부 시절"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곤 했다. 주교로 살아가면서도 본당신부 생활을 무척 그리워했다. 그래서 주교직을 내놓고 다시 본당신부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기도 했다.

 그는 마산교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 47살에 한국 가톨릭의 얼굴인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는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반문하면서 서울대교구장직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추기경이 되기 직전까지 하느님 손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소신학교 입학, 일본 유학, 사제수품, 주교임명 등 신상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마다 도망치고 싶은 유혹과 남몰래 싸웠다.

 추기경 임명소식을 들었을 때도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이 지어지고, 그 때문에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는 시간도 더 길어졌다.

 그가 교회와 인간, 교회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이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에 새롭게 눈을 떴다. 만일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다면 민주화운동 시절 숱한 위기와 교회 안팎의 비난에 크게 흔들렸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돼야 한다"며 공의회 정신 실천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당시 시대적 요청은 인권과 정의를 위해 투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과 민주화 열망이 서서히 분출되던 시기였다.

 사회 민주화를 향한 그의 행보는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특히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에 반대하는 보수성향 원로사제들의 비난을 감당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그는 "그때 십자가 앞에 서면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기만 했다"는 말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30년 서울대교구장 생활을 마친 뒤에도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 불면증을 `30년 불치병`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아울러 서울대교구장 재임기간은 교세 급팽창기이기도 했다. 해가 다르게 증가하는 본당과 사도직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벅찼다. 그런 와중에서도 수도 서울의 교구 책임자로서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1984년)와 서울 세계성체대회(1989년)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는 "시원하기는 한데 섭섭하지는 않다"는 말로 퇴임소감을 대신하며 중책에서 벗어난 것을 홀가분해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참으로 각별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열악한 시설에서 신음하는 행려병자와 장애인들을 보고 사회복지사업에 투신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마산교구장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도 지역 빈민실태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 주민들을 자주 찾아가고, 빈민사목 관계자들과 유달리 가깝게 지낸 데서도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기쁜 마음으로 산동네와 소규모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점을 늘 아쉬워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의 몸과 피까지 내어주셨는데 난 그 흉내도 내보지 못했다. 내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한테 꾸지람 들어야 할 잘못이 바로 그 점"이라는 말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혜화동 신학교 내 사제관에 거주하면서 강연, 미사집전, 손님맞이 등으로 바쁘게 여생을 보냈다. 특히 젊은이들이 부르는 곳은 마다하지 않았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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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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