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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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신문사 사장 재임시 함께 근무한 권정신씨

그분을 아버지요 스승으로 모신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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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후 김수환 추기경과 권정신씨(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 가톨릭신문사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 권정신씨에게 김수환 추기경은 자상한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멘토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고(故) 김수환 추기경 처럼 전 국민이 존경하는 이를 멘토로 두기란 더욱 쉽지 않다. 1964년 가톨릭시보사에 입사하면서 당시 사장이던 김 추기경과 인연을 맺은 권정신(베다·69)씨의 기억 속에 김 추기경은 인생의 고비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은 좋은 스승으로 남아 있다.

함께하시는 분

내가 가톨릭시보사(가톨릭신문사의 전신)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어려웠었다. 감원이 있었던 직후라 일손도 부족했다. 당시 편집국에는 유재봉 편집부장과 사원 이단원씨와 나, 그리고 교정을 보던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때문에 항상 부족한 일손을 사장이셨던 김 추기경님이 메워주셨다. 같이 교정도 보고 기사를 쓰기도 하셨다. 그래서일까. 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기보다는 항상 함께있어 친근한 분으로 느껴졌다.

입사하자마자 맡은 일은 외신기사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거기에서부터 추기경님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1963년 8월 경북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나는 대구가톨릭학생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대구가톨릭학생회와 같은 건물에 있었던 가톨릭신문사 사장이셨던 추기경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셔서 사장실로 갔었다.

긴장해서 앉아있는데 추기경님은 외신기사 20여 꼭지를 건네주면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번역해 놓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번역을 해놓았다. 2시간 뒤 김 추기경님이 돌아오셔서 번역한 기사를 읽어보시고 “이만하면 되겠네”라며 당장 출근하라고 하셨다.

수습기자가 되어서 받은 첫 월급이 4000원이었다. 나는 두 달 만에 정식기자가 돼 8000원을 받게 됐었다. 하지만 편찮으신 홀어머니를 치료해야 했기에 월급은 턱없이 부족하곤 했다. 그때마다 추기경님이 따로 부르셔서 약값 등으로 1만원~1만5000원 정도 더 챙겨주셨다.

추기경님은 항상 직원들과 함께 하시려고 노력하셨다. 부활이나 성탄절이 되면 직원은 물론 가족들까지 초대해 미사를 봉헌하고 파티도 마련하기도 했다. 1965년도 성탄절 때는 세례를 받은 우리 어머니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어주셨다. 그러다 보니 경영자와 종업원이 일심동체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열정으로 가득한 분

2년 동안 외신을 번역했던 것 같다. 내가 번역한 것은 추기경님이 교정을 보셨고 교회 전문지식이 필요한 외신은 직접 번역하시기도 했다.

당시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한창이었다. 김 추기경님은 공의회 소식 보도에 무척 열정적이셨다.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령과 선언문도 바로 번역해 보도할 정도였다. 공의회 기사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4면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8면으로 증면하기도 했다.

추기경님은 “공의회 문서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려면 4~5년이 걸린다”며 “그 전에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에게 공의회에서 논의된, 그리고 결정된 사항을 알려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신문제작에 있어서는 정말 철저하신 분이셨다. 당신이 쓴 기사도 몇 번이고 다시 검토하셨다. 한 번은 오케이 사인을 내려놓고도 다시 가져오라고 지시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 중 한 단어를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꼼꼼하고 철저하신 분이셨던 것 같다.

주간회의는 물론 월간회의, 연간회의 등을 통해서 신문의 방향을 미리 계획하셨다. 또 사설을 비롯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논설위원단을 구성해서 칼럼과 번역을 부탁했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는 밤을 새면서까지도 번역해 보도하려고 하셨다. 대표적으로 교황 바오로 6세가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교황이 로마를 벗어나 다른 나라를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대서특필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 것이 화요일이나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 수요일에 신문을 발행했는데 신문 발행시간도 늦추고 추기경님과 내가 밤새워서 관련 기사를 번역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열심히 하다 보니 신문을 구독하는 신자들도 늘어났다. 추기경님이 처음 사장으로 부임하셨을 때 2만부 정도였던 것이 떠나실 때는 5~6만부까지 증가했으니까 말이다.

마음이 따뜻하신 분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이다 보니 추기경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하지만 추기경님은 당장의 도움보다는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려고 하셨다. 사업하다가 망했다는 사람이 찾아오면 그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 놓고 기초조사를 해서 어떻게 도움을 주면 좋을지를 고민하셨다. 구멍가게에는 물건을 넣어주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레에 비누를 2~3만원치 얹어서 보내주신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당신 가족들에게는 조금 인색하셨던 것 같다. 옹기장사를 하셨던 누님의 딸이 대학등록금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대신 돈을 보내드렸었다. 당시에 은인들이 보내온 통장 관리를 내가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아시고 추기경님이 나를 호되게 혼내셨다. 당신 가족보다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보사일도 바쁘셨지만 추기경님은 여러 모로 바쁘셨다. 특히나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바쁜 일정 중에도 일요일만 되면 교도소에 가서 미사를 봉헌



가톨릭신문  200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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