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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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정일우 신부(예수회)

가난한 이들에 위로·희망되어 주신 분. 교구 빈민사목위 신설해 교회 철거민 사목 기반 마련.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픈 열망 이루지 못해 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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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양평동 철거민촌을 방문하고 있다(1977년 4월 7일).
추기경은 여러 차례 철거민들을 방문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눴다.
 


 
▲ 정일우 신부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만큼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이 항상 먼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대상이었다. 정일우 신부(예수회·John V. Daly·73).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복음을 살고픈 마음 하나로 1973년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갔다.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진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그저 살았다. 판자촌에 발을 내디딘 첫 해 만난 ‘정구’(고 제정구 의원)와는 둘도 없이 막역한 친구가 되어 판자촌에서 함께 살았다.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전전하며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 등을 펼치며 사랑의 열기를 모락모락 피워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약 10년간 김 추기경의 영적 지도 신부라는 수식어도 달고 살았다.

정 신부는 이야기한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고 시간을 나누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음입니다.”

그의 기억 속 김 추기경은 아무리 바쁘고 힘든 시간이라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와주는 성직자였다. 정 신부의 ‘보증인’이었고, ‘영성의 배경’이었고, ‘그냥 겸손한 분’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정 신부와 ‘정구’를 사랑해준 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뵌 때가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975년 정구와 같이 서울 양평동 판자촌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때, 김 추기경님의 배려로 약 7개월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살았던 것이 가장 또렷한 기억의 시작이다.

명동본당 보좌로 살던 어느 날 추기경님을 찾아뵙곤 양평동 판잣집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추기경님은 “아주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당시는 판자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정구와 각각 ‘양심선언’을 써서 냉큼 추기경님께 내밀었다. 행여 어처구니없는 구속 사태 등을 막기 위해 보증을 서달라는 요청이었다. 김 추기경님은 두말없이 나와 정구의 실제적인 보증인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김 추기경님은 양평동 판자촌이 철거될 때까지 몇 차례나 오셔서 미사를 주례해주셨다. 다섯 평 남짓한 ‘예수회 복음자리’ 공간에 간판을 걸 때도, 그 복음자리가 철거될 때에도 함께 해주셨다. 어린 꼬마들과 주민들이 좁은 방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은 채 미사를 드릴 때 추기경님은 “철거를 목전에 둔 여러분을 볼 때 나 역시 마음이 어둡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려움을 통해서 더 큰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자. 다른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여러분 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여러분은 가난하기에 가장 소중한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더욱 가까이 느끼고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게 따스하게 대해 주시던 김 추기경님께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달려갔다.

양평동 철거 당시, 주민들이 이주할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도대체 철거민들이 살만한 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땅이 너무 비싸 국민들이 살 곳이 없었다. 돈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다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둔 땅만 넘쳐났다. 그나마 쓸 만한 땅도 나중에 개발이익을 보겠다고 팔지 않았다. 무자비한 대한민국과 강제철거와 마주하면서 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 추기경님을 찾아가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 국민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하는 겁니까?”

그런 내 모습에 깜짝 놀란 김 추기경님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이주할 땅을 살 돈을 후원받을 수 있도록 즉시 독일교회 해외지원단체를 소개해주셨다. 이주할 곳을 찾느라 헤매는 주민들을 위해 행정당국에 편의도 부탁해주셨다.

“당시 신부님께서 철거민들을 이끌고 양평동 판자촌을 떠나는 모습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김 추기경님께 전해들은 말이었다. 추기경님은 판자촌 주민들이 경기도 시흥군으로 집단이주해 집을 짓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셨다. 주민들 곁에 와서 표현해주시는 위로와 격려는 그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자 재개발로 인한 철거가 연이어졌다. 수많은 산동네는 철거바람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 가운데 아파 울부짖는 철거민들 곁에서 추기경님은 미사를 봉헌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자신을 내어주셨다. 또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강제철거가 극에 달하자 서울대교구에 도시빈민사목위원회를 설치해 교회가 철거민들의 아픔에 보다 능동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셨다.

김 추기경님은 갖가지 공석에서 축사 등을 하실 때가 참 많았는데, 내가 강하게 기억하는 말씀이 있었다.

“삶의 자리! 이보다 더 근본적이요 최소한의 요구가 있겠는가.”

1989년 6월에 열린 아시아 도시빈민대회장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삶의 자리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할 자리가 없는데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정부와 대기업 또는 어떤 개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집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호화주택을 짓거나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삶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가톨릭신문  200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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