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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 추모 국제 학술 심포지엄]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비전

격동의 시대에 풍랑·비바람 온몸으로 견뎌. 약자 편에서 사회정의 지킨 참 목자. 일본 유학 기간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도약한 계기. 2차 세계대전 겪으며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 다져. 두 번의 전쟁 겪으며 ‘사제직’ 소명 다져. 군사 독재정권 맞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 어려운 이 위해 대변자·보호자 역할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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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일 주교는 이 사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업적은 당신 스스로의 계획이 아닌 오직 하느님 뜻에 따라 순명한 삶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발제 : 강우일 주교(주교회의 의장·제주교구장)

나는 1977년부터 1998년까지 21년 동안 서울대교구청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살았기에 아마 이 자리에 초대됐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 그분을 나의 교구장과 장상으로 바로 옆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학술적인 심포지엄 자리에서 그분의 삶을 논의하는 것은 심적 부담이 된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라도 자신과 생애를 함께 한 부모 또는 형제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연다면 비슷한 심정을 느낄 것이다. 김 추기경의 한 생애는 나와 아주 가깝고, 또 내 삶과 연결돼 있었기에 오히려 객관화시키기가 어렵고 어색하다.

한마디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사회와 가톨릭교회가 살았던 격동의 20세기 한복판에서 시대의 풍랑과 비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수많은 시달림을 겪다가 가신 우리 선배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분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나 미화를 하지 않고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길이며, 그분에 대한 예의이고 또 우리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독립을 얻기 전 23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다스리는 식민지 상황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청년 김수환도 조국의 이런 상황에 대해 항상 마음으로부터 불만과 울분을 지니며 살았다. 자신의 언어를 억압당하고, 위로부터 덧씌워진 문화를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조선사회 전체의 굴욕적인 현실에 부당함과 분노를 느꼈다.

김 추기경은 언젠가 당신의 동성학교 재학시절 과거를 회고하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신 과목의 시험을 치르게 됐다. 수신이란 과목은 오늘날 윤리에 해당하는 학과목이다. 당연히 동서양의 철학자나 위인의 가르침에 대한 문제가 나올 줄 알고 시험 준비를 했는데, 그런 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당시 일본 천황이 조선의 청년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묻는 문제가 나온 것이다. 이 문제를 받아들고 소년 김수환은 속으로 반감이 치솟으며 처음엔 백지 답안을 낼까 하다가 간단하게 몇 자 적었다고 한다.

‘첫째,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둘째, 그러므로 소감이 없다.’

김수환은 이런 답안을 내고 교장선생께 불려가 혼이 났다. 이 작은 사건은 소년 김수환의 가슴 속에 어떤 정신적 울분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회에서 아무런 권한이나 지위도 없고, 또 발언권도 없는 평범한 소년에 지나질 않았다. 체제의 모순과 민족의 불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저항 운동을 일으키거나 어떤 거사를 할 만한 연령이나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열심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앙의 정신적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천주교는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해 일절언급을 하지 않았고, 되도록 만사에 있어 순명하며 사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 김수환도 마음속에 욕구불만이 가득했지만, 현실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굴의 강한 의지와 이념을 갖고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투사나 운동가는 아니었다.

김수환은 우선 소신학교 예과 과정에 들어갔다. 오늘날로 치자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였고, 그 예과를 2년 마친 다음에야 중등학교 과정인 소신학교 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이가 무슨 사제성소를 그렇게 느낄 수 있겠는가. 특히 그의 경우엔 스스로 성소를 느낀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께서 ‘너는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소신학교 과정 중에도 특별히 신학교 생활에 애착이 가거나 보람을 느끼지도 못했다. 늘 집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리워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 번은 퇴교당하기 위해 일부러 규칙을 어기기도 했다.

대신학교에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사제성소에 확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으니 자퇴를 결심하고 학장 신부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단다.

‘저는 제가 원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가라고 하셔서 입학했으니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학장 신부님은 그의 자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김수환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높은 이상을 향해 달려갔다는 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떠밀려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는 대신학교 과정 중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일본 유학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선발고사를 치러 합격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주교님의 호출에 따른 것이다. 뜻하지 않게 가게 된 유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청년 김수환은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 조선에선 접하지 못했던 일본의 새로운 문화와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일본 상지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전에는 그냥 적대감과 반감만으로 바라보던 일본 문화를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비록 자신이 미워하는 나라지만 그 안에 긍정적인 면이나 배울 점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또 일본인이지만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렇듯 일본 유학 기간은 김수환이 한 인간으로서 더 크게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인격적 기반을 갖추는 양성의 기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르러 전황이 급박해지자 동경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김수환은 학병으로 나가게 된다. 본인은 학병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버텼다. 그는 훗날 ‘조국을 위해서가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 누가 전쟁에 나가고 싶었겠느냐’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향의 친지들을 동원해 청년 김수환이 입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가족들은 물론 나중엔 대구대교구장이 일본 행정당국에 몹시 시달렸다. 결국엔 교구장이 김수환에게 입대하라고 전보를 쳤고, 그는 그 전보를 받고는 바로 학병에 지원했다. 이렇게 억지로 떠밀려서 간 전쟁이었지만 청년 김수환은 이 전쟁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남방의 ‘부도’라는 작은 섬으로 파견된 그는 다행히 그곳에서는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총을 쏘고 싸우는 경험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매번 위기



가톨릭신문  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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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9장 21절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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