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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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신명자 이사장

“함께 살고 싶다, 가난한 이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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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구 의원의 「신부와 벽돌공」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 왼쪽이 제정구 의원과 신명자 이사장이다.
김 추기경은 제 의원을 자신의 ‘스승’이라고까지 부르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그를 존경했다.
 

 
▲ 김수환 추기경을 가난 자체를 즐길 줄 알았던 참 목자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신명자 이사장.
 

‘빈민운동의 대부’,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불렸던 고 제정구(바오로·1944∼1999) 의원을 두고 고 김수환 추기경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의 ‘스승’ 또는 ‘선생’이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았다. ‘가난’의 참 뜻을 알고, 나아가 그 가난을 평생의 삶으로 산 존재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많은 이들 사이에 상생과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고 간 고 제정구 의원 옆에는 스스로를 ‘그림자’로 부르고 또 그렇게 산 부인 신명자(베로니카·57·인천교구 은행동본당)씨가 있었다. 김 추기경은 생전, 신씨를 ‘숨어 있는 별’이라고 했다. 그런 별들이 세상을 움직인다고도 했다.

신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복지법인인 복음자리 이사장으로 고인들이 남긴 고귀한 뜻을 이으며 어둠이 내린 세상에 소중한 빛을 던지고 있다. 신 이사장의 기억 속에 자리한 김수환 추기경을 떠올리는 일은 ‘가난의 영성’, 그리고 가난 그 자체와 조우하는 일이기도 하다.

# ‘아름아, 아름아!’

지금도 내게는 ‘아름아, 아름아!’하시며 큰딸아이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던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과 목소리가 어젯일처럼 생생하다. 당신 눈에라도 띌라치면 언제 오셨는지 살짝이 다가오셔서 옆구리를 툭 치시며 먼저 웃음을 보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마치 끔찍이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아버지처럼 나와 가족들을 대해주셨다고 할까. 짧은 표현력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늘 우리에게 따뜻하고 자상하신 아버지이셨다.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은 청계천 판자촌마저 철거돼 1975년 11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울 양평동 판자촌으로 옮기고 나서였다. 이듬해 2월 부엌까지 합해도 채 5평이 될까말까한 공간을 마을사랑방으로 마련해 ‘복음자리’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 때였다. ‘복음자리’라는 이름도 추기경께서 직접 지어주셨는데 현판식을 하는 자리에서 처음 그분을 뵀다. 늘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 때만 해도 쉬 범접할 수 없는 너무나 높은 분으로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당시는 판자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던 시절이었는데 추기경께서 직접 보증인이 되어주셔서 고단한 삶이나마 양평동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경찰청, 경찰서 등 이른바 기관 네댓 군데에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 몰아붙이기 일쑤고 잠자는 방 안까지 들이닥치는 일도 예사였다.

그저 주민들 가운데서 주민들과 함께 지내보자는 생각에 양평동 판자촌으로 들어간 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편하기만 한 진실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모들이 벌이를 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하는 상황이어서 노래라고는 유행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부모들이 없는 낮시간 동안 아이들을 모아 지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성탄절이 다가올 무렵 돌봐주신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아이들과 함께 크레파스로 성탄 카드를 만들어 추기경께 보내드렸다. 카드라고 해야 아이들이 저마다 한 가지 색으로 그려 만든 것이어서 볼품이라곤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카드를 받으신 추기경께서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를 찾아오셨다. 당시로서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분의 소탈하심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는 면이었다.

한 번은 추기경께서 복음자리를 찾아오셨다가 슬그머니 다가오시더니 봉투를 쥐어주셨다. 5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큰 돈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매달 4만 원씩을 떼어내 양평동에서의 첫해를 넘길 수 있었다. 너무도 귀한 선물이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4만 원에서도 8700원을 쪼개 저축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추기경께서 우리 가족을 살리신 셈이다.

김 추기경의 이렇듯 푸근한 사랑을 비롯해 가톨릭교회로부터 느끼게 된 따뜻함 때문일까, 1976년 4월 결혼할 당시만 해도 개신교 신자였던 우리 부부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게 됐다. 양평동 판자촌이 철거된 1977년 4월까지 1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을 키워올 수 있었다.

# 사랑은 함께하고픈 열망

양평동 판자촌에 철거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간 ‘복음자리’를 중심으로 사랑을 꽃피우고 공동체를 일궈온 주민들의 생각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한데 어울려 마음 편하게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데 모아졌다. 하지만 함께하고 계시던 정일우 신부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옮겨갈 만한 땅이 없었다. 가난한 우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땅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이 때 추기경이 나서셨다. 추기경은 독일 교회의 해외원조 기구인 미제레올(Misereor)에 손수 편지를 쓰셔서 지원을 요청하셨다. 덕분에 정 신부님이 직접 독일에서 미화 10만 달러를 들여오셔서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에 3600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해 ‘복음자리’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김 추기경은 강제철거를 앞둔 1977년 4월 7일 몸소 양평동 판자촌 복음자리를 찾아오셔서 미사를 주례하시며 우리의 새로운 여정을 축복해주셨다.

4월 10일 부활절 아침 양평동



가톨릭신문  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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