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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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수환 추기경/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켰던 박신언 몬시뇰

늘 기도하도록 보살펴 주셨던 깊은 뜻과 은혜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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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는 김 추기경과 각별한 사연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김 추기경 뜻에 따라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와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고, 2002년에는 옹기장학회 설립 산파역을 맡았을 뿐 아니라 김 추기경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던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앞두고 박 몬시뇰을 만나 `나와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들었다.
 
 ▲김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신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감회가 어떠신지요?
 -지금도 문득문득 어떻게 지내시는지, 어디 편찮은 데는 없으신지 궁금해서 `문안인사 가야지` 하는 착각을 합니다. 추기경님 선종에 대해 각계각층 사람들이 각각의 의미를 부여합니다만, 깊은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추기경님을 모시고 살았던 18년 세월이 제 가슴을 저미게 하곤 합니다. 아직도 등 뒤에서 "야! 박 신부!"하고 부르시는 것만 같아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추기경님과 함께하시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추기경님은 1979년 6월 저를 압구정본당 주임으로 발령하시면서 "재임 기간 5년 안에 성당 지을 땅만이라도 확보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설본당 땅은 교구에서 마련해 주던 때였지요. 제가 압구정본당에 부임할 당시 신자 수는 670명이었는데, 1982년 6월 12일 성전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부임한 지 3년 만에 땅을 사고 짓기도 한 것이지요. 지금도 당시 신자들의 헌신과 노력을 잊지 못합니다.
 봉헌식을 마치고 3개월이 채 못 되던 1982년 9월 8일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저를 교구청으로 발령하시면서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사무국장, 그러니까 200주년 행사를 기획하고 총괄하라시는 거예요. 저는 맡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사양했지요. 능력도 부족하고 교황님을 뵌 적도 없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부임하고서는 매일 저녁 성당에 앉아 울기만 했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해서요. 얼마 남지 않은 2년 후에 교황님께서 오신다는데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걱정스러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보름 정도 지났을까? 추기경님과 단 둘이 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추기경님도 제가 울며 고민하는 걸 보셨는지 말문을 여셨습니다.
 "천주교가 가혹하지?" "아니요!" "왜?" "하느님께서 저를 굉장히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압구정성당 지어놓고 팔자가 편하게 될 것 같으니까 하느님이 저를 계속 기도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울며 기도한 끝이라 마음이 많이 정리된 상태였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토록 흐뭇해하고 만족해하시면서 "그래! 그래!"하던 추기경님 표정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행사를 무사히 마친 뒤 추기경님께서 로마만 다녀오시면 "너 때문에 내가 로마 가면 행사 잘 했다고 대접 받는다"며 기뻐하시곤 했지요.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준비는 어떤 연유로 맡게 되셨습니까?
 -1987년 5월 추기경님께서 로마 회의에 다녀오시더니 "네가 있어서 일을 또 하나 저질렀다"고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200주년 때는 교황님이 방문을 결정하셨지만 세계성체대회는 우리가 신청해야 된대. 교황청 국무성 장관이 89년에는 한국이 개최하면 어떻겠냐고 언질을 주길래, 내가 신청했어!"
 식사 도중에 죽어도 안 하겠다고 뛰쳐나간 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행사분과위원장으로 일을 했지만 그땐 왜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총이었는데….
 
 ▲몬시뇰께서 옹기장학회 설립을 추기경님께 권하셨다지요?
 -2002년 2월에 추기경님 뜻이 담긴 장학회를 하나 설립하겠다고 추기경님께 말씀드렸는데,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해 11월 13일 `스테파노장학회` 설립 기획안을 만들어 보고를 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시면서 자신의 세례명인 스테파노로 하지 말고 옹기장학회로 하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비서 수녀님께서 "장학회 이름은 무엇으로 정했어요? 추기경님 아호 `옹기`로 하면 어떨까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추기경님 아호가 `옹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11월 22일 추기경님을 모시고 발기인 총회를 열어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회장으로 뽑았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당신 사재를 털어 내놓으시면서 북한동포에 대한 애정을 장학회 설립 의의에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수여할 때마다 수혜자들에게 설립 취지를 설명해 주셨지요.
 
 ▲추기경님께서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후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자주 찾아뵌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 9월 11일 저녁식사 후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는 전화가 왔어요. 말씀을 잘 못하셔서 글로 써서 고해성사를 보시고, 병자성사도 받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 제가 병자성사를 두 번 드렸네요. 앞서 7월 30일 추기경님이 혼수상태이시니 병자성사를 드려달라는 비서 수녀님 요청을 받고 급히 가서 첫 번째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추기경님이 다소 회복되신 다음, "네가 병자성사 줬다며?"라고 말을 건네시던 기억이 납니다.
 2008년 10월 4일 토요일이었습니다. 본당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추기경님 가시는 것 보라"는 비서신부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달려가 주치의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복시켜 달라고 했더니, 주치의가 하느님 뜻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계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회복되셨습니다. 10월 6일 새벽에 추기경님을 뵈러 갔습니다. "잘 왔다. 나 좀 따뜻하게 해줘"라고 하셔서 이불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휠체어에 태워 밖으로 나가자고 하셔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추기경님이 "그전엔 말을 잘 듣더니 이젠 안 듣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어요. "그 전에도 잘 안 들었는데요." 추기경님은 "그랬나?" 하시면서 제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이후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실 때까지는 이것저것 꼼꼼히 준비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이제는 보고 싶은 추기경님이 됐습니다. 입원하셨을 때는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가서 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 밑에서 사제생활하면서 처음엔 어렵고 힘든 일만 시킨다고 원망도 많이 했는데, 지나고 보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를 주셔서 제가 늘 기도하게끔 보살펴 주셨던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깊은 뜻에 한 없이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느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찬 추기경님의 인자한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봅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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