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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의 삶 산 목자

김옥균 주교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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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 주교는 1925년 12월 유서 깊은 교우촌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대대리에서 아버지 김병희(필립보)와 어머니 방 아가타 사이의 2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공소 회장이었고, 그의 집은 곧 마을의 공소였다.

 김 주교는 네다섯 살 무렵 공소 미사가 시작되면 으레 맨 앞자리에 앉아 미사 광경을 뚫어지게 지켜봤고, 미사가 끝나면 제의 대신 혼자 담요를 덮어쓰고 밥상 앞에서 미사드리는 모습을 흉내내곤 했다. 그런 그가 사제의 꿈은 갖게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김 주교에게 신앙적으로 절대적 영향을 미친 이는 어머니였다. 김 주교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매일 새벽에 나를 데리고 미사에 참례하셨던 그 정성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믿음의 원천"이라며 "내가 주교지만 어머니 신앙심은 못 따라간다"고 어머니의 깊은 신앙과 사랑에 고개를 숙였다.

 김 주교가 일곱 살 때 이사를 간 남곡리(은이)는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사목했던 성지였다. 김 신부가 공소로 썼던 집과 붙어있는 집에 살았던 김 주교는 사제 생활 내내 용인 은이공소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집무실에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셔놓고 성인의 도우심을 청한 김 주교는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주교 사목 표어도 `이 땅에 빛을`로 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1942년 서울 소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태평양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신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덕원신학교와 용산에 있던 소신학교를 거쳐 1950년 혜화동 성신대학(대신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신학교에 복학한 그가 갑작스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은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의 명에 따라서였다. 김 주교는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고 신문학을 공부했다. 그때 서울대교구가 경향신문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신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노 대주교의 생각이었다.

 1959년 김 주교 귀국 직후 경향신문이 폐간됨에 따라 신문학을 공부한 보람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그의 경력을 가톨릭출판사 사장으로, 그리고 훗날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을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으로서 매스컴을 통한 선교라는 새로운 장을 열게 하는 데 적극 활용하셨다.

 귀국 이후 김 주교는 1985년 3월 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종로ㆍ명수대ㆍ청파동ㆍ수유동본당 주임과 교구 사무처장ㆍ관리국장ㆍ총대리 등을 지내면서 본당 사목과 교구 행정을 두루두루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폭넓은 사목 경험이 1980∼90년대 총대리 주교 시절, 교세가 급팽창하는 전환기에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서울대교구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주교를 처음 볼 때는 빈틈이 없는 엄한 아버지 같은데,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볼 때면 더없이 부드러운 인품을 가진 분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미소와 악수로 대하는 김 주교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해줄 것만 같은 자상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곤 했다. 김 주교가 서울대교구 총대리로 17년간 살아오면서 보여준 사목 스타일도 늘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엄하게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 1996년 한국 주교단의 교황청 정기방문에 참석한 김옥균 주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있다.
 

 김 주교는 스스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이라고 할만큼 신중했고, 또 순리를 따랐다. 방대한 서울대교구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선 모든 면에서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구 관계자들은 김 주교가 재임하는 동안 교구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별다른 무리가 없었던 것은 이처럼 신중하고도 순리를 따르는 그의 성품 및 업무처리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 주교는 교구 인사 및 재정 책임자로서 생각지도 못한 비난을 받을 때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겼다고 한다. 또 사제 인사 때 외지로 나가는 사제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1년 김 주교가 퇴임할 때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 지난 20년간 수많은 본당을 신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김 주교님 공로"라고 김 주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꼼꼼한 김 주교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매사에 공평하고 소홀함이 없도록 중용의 길을 걷고자 노력해왔지만 손이 부족하다 보니 소외지역이 있게 되더라"고 여러 차례 토로했던 김 주교는 사회복지 시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챙겨주기도 했다. 김 주교의 이러한 관심과 보살핌은 은퇴 후에도 1주일에 한 번씩 서울 신내동에 있는 노인 요양원에 가서 봉사하는 활동으로 오랫 동안 이어졌다.

 김 주교는 최근 "하느님께서 제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시면 드릴 말씀이 없다는 것이 화두"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김 주교가 사제와 주교로서 이룬 업적을 돌이켜보면 겸양의 표현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이 말은 삶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그는 평소 후배 사제들에게 당부한 것처럼 계획성 있는, 겸손한, 그리고 기도하는 삶을 살다가 갔다. 김 주교는 은퇴 후 평화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 내 안에는 주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지금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김옥균 주교 약력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용인 출생
△1949년 12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철학과 졸업
△1954년 12월 프랑스 릴가톨릭대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사제수품(프랑스 릴교구주교좌성당)
△1957년 7월 릴가톨릭대 대학원 졸업(신학 전공)
△1959년 6월 릴가톨릭대(신문학 전공)
△1959년~1962년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1962년 서울대교구 상서국장
△1965년~1982년 종로ㆍ흑석동ㆍ당산동ㆍ노량진 동ㆍ청파동ㆍ수유동본당 주임
△1982년~1985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ㆍ관리국장ㆍ총대리 겸임
△1985년 4월 주교수품,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
△1989년~2001년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이사장
△2000년 6월 가톨릭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2001년 12월 원로사목자
△2010년 3월 1일 선종



가톨릭평화신문  201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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