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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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7) ‘왜?’를 물으면 답이 보인다

사람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자유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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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의 비밀 코드, ‘왜?’

창세기 속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 것과 관련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하나 잘라내셨다. 그러고는 옆에다 탁 놓으셨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삽살개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갈비뼈를 물고 도망갔다. 하느님이 그걸 보시고 쫓아가셔서 딱 잡았는데 마침 잡힌 것은 꼬리였다. 이에 삽살개는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려다 결국 제 꼬리가 잘리고 말았다. 삽살개는 갈비뼈를 입에 물고 냅다 뛰었다. 하느님은 하는 수 없이 삽살개 꼬리를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다. 그 다음부터 여자가 꼬리를 치고 다녔다는 것이다. ‘꼬리친다’라는 말의 근거 없는 유래다.

이렇듯이 창세기의 진술을 ‘어떻게?’에 맞추어 이해하려다 보면, 별별 난센스들이 생겨난다.

창세기의 비밀을 알아내는 코드는 ‘왜?’다. 성경 전체의 관심은 철저하게 ‘왜?’에 있었지 ‘어떻게?’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인은 주로 ‘왜’를 물었다.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를 ‘히브리적 사유’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인은 ‘어떻게’를 물었다.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가? 국가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 이를 ‘희랍적 사유’라고 한다.

이 ‘어떻게’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면 자연과학이 발달한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자연과학이 생겨나, 피타고라스부터 시작해서 수학, 물리학 등이 그리스 철학자들을 통해서 인류의 자연과학 발달에 기여했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면 철학이 발달하게 되고, 영성 쪽으로 초점이 가게 된다.

이 의미를 찾는 물음은 신앙으로 가게 되어 있다. 곧 하느님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고통이 어떻게 발생했느냐”는 물리적, 의학적 현상이지만, “고통이 왜 발생했느냐”는 삶의 문제고, 영성이고, 신앙이 된다.

성경은 유다인에 의해 쓰였으므로 이 ‘왜’라는 질문으로 주로 기술이 됐다. 그래서 창세기 1장도 ‘어떻게’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라는 걸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이 하느님의 창조에 있다는 사실만 선언할 뿐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라는 과학적 질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6일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 역시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창조의 ‘질서’ 곧 ‘왜’ 인간이 창조계의 절정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을 가지고 출발하면 여태 숨겨져 있던 창세기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이제 두 가지만 확인해 보자.

■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만드셨다. 왜 갈비뼈로 만드셨을까? 이는 옆구리가 주는 상징성, 즉 ‘동등하다’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여자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갈비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여자가 남자인 아담과 완전한 의미에서 동등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갈비뼈는 정확하게 옆구리, 머리뼈도 아니요 발가락뼈도 아닌 상하의 중간부위를 가리킨다. 곧 남자보다 높은 존재도 아니요 낮은 존재도 아님을 가리키는 상징부위다.

이렇게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거들짝 하와를 보고난 아담이 환희의 탄성을 올린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이쉬)에게서 나왔으니 여자(잇샤)라 불리리라”(창세 2,23).

히브리어로 지아비를 ‘이쉬’라 부르고 지어미를 ‘잇샤’라 부른다. 한 단어를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변화시켜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뿌리, 곧 한 몸에서 두 개의 성(性)이 나왔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다시 남녀 결합의 근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4-25).

이로써 이야기는 창조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를 묻지 않고 ‘왜?’를 물으니 이처럼 심오한 의미가 고구마 줄기처럼 파헤쳐 진다. 요컨대, ‘갈비뼈’는 동등성의 상징이며 다시 하나로 결합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이제 창세기 2장의 내용, 선악과 이야기를 주목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이 말씀을 읽고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에이, 좀 다 따 먹게 하시지. 그거 하나를 그렇게 남겨두고 그러시나?”

많은 이들이 선악과 이야기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선악과는 “태초에 명령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여기서도 비밀을 밝히는 코드는 ‘왜?’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 명령을 내셨을까?”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경계, 창조주와 피조물 경계를 확연히 그어주는 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명령을 두고 흔히 사람들은 “이 명령이 꼭 필요했을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한 부모가 있다. 그 부모는 자녀들과 사이가 너무 좋다. 자녀에게 무엇이든 다 줄 수 있고, 다 양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부모에게 맞먹으려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양보할 수 있겠는가? 딸이 엄마에게 “내가 엄마 만든 걸로 하고 놉시다”라고 말한다면 용납할 수 있겠는가? 천하없어도 그 질서는 깨질 수 없다. 그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명령이다.

“너가 무엇이든 다 해도 좋은데 내 영역만은 건드리지 마라.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인간이다. 이거 하나는 지켜라.”

이것이 명령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딱 이 명령 하나가 위계질서를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이 질서가 깨지면 다 깨진다. 끝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소위 ‘오사리잡탕’이라고 한다. 결국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막아주는 것이 선악과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욥기는 말한다.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

이것은 영성적인 이야기다. 곧 하느님과 우리가 아무리 가깝게 지내고, 친하고 격이 없다 하더라도 어떤 때는 선(線)이 있다. 그 선을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선사된 자유’, ‘주어진 자유’다. 이 말은 삶의 영역 곧 바운더리(boundary)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선을 지키는 한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물고기는 물에서 자유롭다. 물고기가 물이 갑갑하여 뭍으로 나오면, 바로 죽는다.

사람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즐긴다. 사람이 말씀에 부대껴서 말씀을 떠나는 순간, 여지없이 죽는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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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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