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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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23) 예수님, 언더그라운드 30년을 청산하다

선포 말씀 몸소 구현하는 구원의 대장정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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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윌리스의 반전

영화 <벤허>는 기억해도 루이스 윌리스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벤허>는 20세기에 나온 영화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이다. 이 영화의 원작자가 바로 루이스 윌리스다.

그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이 되었다. 그가 한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성경의 진실성 문제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가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 어떻게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는 한낱 인간일 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 해괴한 주장이 어디 있어.”

얘기가 이쯤에 이르렀을 때 그가 제안했다.

“그렇다면, 성경의 오류를 논리적으로 밝혀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거 좋은 생각일세.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머리가 비상하니 말이야.”

이렇게 해서 윌리스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예수님이 한낱 사람임을 증명하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탐구하는 동안 그는 오히려 성경의 진실성에 설득되었다. 그는 차츰 마음이 바뀌었다.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게 되었다.

윌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켰다. 1880년 출판된 <벤허>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1959년 영화화 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숱한 사람들이 성경의 진실성과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성을 의문시하였다. <사도신경>은 이에 대하여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라는 짧은 고백으로 답변할 뿐이다. 하지만 이 짧은 진술은 함축하는 바가 크다. 누구든지 의문이 드는 사람은 역사서를 뒤져 기록을 찾아보라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는 라틴어 본문에서 이렇게 표기된다. ‘수브 폰씨오 필라토’(sub Pontio Pilato). 여기서 ‘수브’는 ‘~아래서’라는 뜻이다. 내용적으로는 ‘통치 아래서’다. 이로써 예수님의 공생활로 들어간다. 3년간의 공생활은 본시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때 시작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정황은 어떠했을까.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30년 후, 세월이 바뀌어 티베리우스 황제가 등장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예를 들어, 시리아와 갈라티아)과 원로원의 통치를 받는 지역(아시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으로 나누어졌다. 이 지역들은 황제의 대리인이나 이들보다 낮은 계급의 총독을 통해 통치되었다. 총독은 세금을 징수하고 치안을 담당했다. ‘본시오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임명을 받아 유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절에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지난 호에서 언급된 ‘탄생’ 이후의 이야기를 짚어 보자.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아기였을 때 상황이 묘사된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하느님께서 특별히 총애하시는 쪼끄만 아기의 모습이 상상되는가? 육신도 건강하고, 지혜도 충만하고, 하느님께 신심도 있고, 그런 아이로 예수님은 자랐다.

그런데 이 모두가 거저 된 것인가? 아니다. 성모님의 베갯머리 교육, 밥상머리 교육 두 가지를 다 받으며 이루어졌다. 베갯머리 교육은 잠들기 전 아이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것이다. 유다인은 이 교육이 굉장히 강했다. 밥상머리 교육은 부모와 자식이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역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유다인 교육이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기 어렵고,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가 힘든 우리나라의 흔한 가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유다인은 이 문화를 철석같이 지켰다. 그러기에 ‘가족이 함께 식사하기’ 하나만 회복해도 우리네 가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여간 바로 그런 교육을 받고 예수님이 자라셨다.

이제 이야기는 한참을 건너뛰고 열두 살 때로 넘어간다. 소년 예수님은 과월절 예배 차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무슨 경위에서인지 부모와 헤어지게 된다. 한참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 앞에서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얘기는 예수님이 드디어 성인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절대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하고 어린 아이가 토론을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열두 살이 되면, 말하자면 율법을 토론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이용하신 거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제 율법 학자들하고 토론하는데 어떻게 됐는가? 그네들이 “아니, 쟤가 어디서 율법을 배웠기에 저렇게 신통 하냐?” 하고 놀랐다.

이때 성모님과 요셉 양부는 속 좀 썩으셨다.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며 꾸지람을 하자, 소년 예수님이 대답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사과는커녕 야단을 쳐 버리셨다. 예수님이 독립을 하기 시작하셨다. 사춘기 예수님이시다.

■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드디어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게 된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광야에 가서 40일간 유혹을 받으신다. 이후 다시 돌아온 예수님은 어느 날 동네 회당에서, 갑자기 “오늘은 내가 독서를 할게”라고 하시며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으신다. 바로 이 내용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뜻이 심오하다. 하나씩 풀어보자.

우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인데, 이는 전체 제목인 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와 같은 기쁜 소식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세 가지가 그 내용이다.

먼저, ‘잡혀간 이들’에서 잡혀갔다는 말은 끌려갔다는 얘기다. 이는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생명이 왜곡되고 침탈된 사람들을 지칭한다.

다음으로, ‘눈먼 이들’이라는 말은 어떤 인습이나 나쁜 전통에 매여서 보지 못하거나, 다른 장애를 입은 이들을 두루 포함한다.

그리고, ‘억압받는 이들’은 내적인 억압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냥 다 놓으면 되는 것을 싸들고서 상처입고, 버리면 되는 걸 안 버리고 꼬깃꼬깃 쟁여놓고는 자승자박으로 고생하는 이들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 바로 ‘희년’선포다. ‘희년’의 근본정신은 회복, 원상복구다. 이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파라다이스, 곧 낙원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낙원은 외부가 아닌, 내 안에 있다. 그러기에 궁극적으로 이 기쁜 소식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겨냥한다. 자기의 본 모습을 회복하는 것 말이다. 이는 나를 관통하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다. “이것을 깨달으면 너희 스스로 본 모습을 발견하여 행복할 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고, 왜곡된 삶을 살 필요가 없단다.”

두루마리를 다 읽으시고는 회중들 앞에서 선포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가톨릭신문  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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