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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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51) 육신은 죄 덩어리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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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지 얼굴을 하지 마라”

연일 큰 건 한방씩 터트리며 가톨릭계의 뉴스메이커로서 예측불허의 행보를 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 그 어른 덕에 요즘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이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순례객들로 북적댄단다. 교황의 인기는 그곳에서만 유난스러운 게 아니다. 내 지인들 중에도 “요새 짜증나는 일만 줄을 잇고 있는 판에, 그나마 교황님 보는 재미가 있어 살만 하다”며 교황에 대한 열혈 사랑을 고백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 역시 그 분이 교회의 고답스런 관행에 대해 툭툭 던지는 ‘쓴소리’의 광팬이다.

그 어르신이 한번은 수녀들을 향하여 된통 뼈있는 말을 던지셨다.

“제발 오이지 얼굴 좀 하지들 마세요. 찌그러진 얼굴살을 펴고 기쁨으로 사세요. 신앙은 본디 기쁜 겁니다.”

공감이 가다마다 그 표현의 절묘함에 키득키득 웃음까지 나오는 말이다. 오이지 얼굴?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난 수녀님들 중에도 꼭 그런 표정으로 수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다. 비단 수녀님들만 그런 게 아니다. 대체로 가톨릭 신자들 얼굴이 영락없는 오이지상 아닌가. 진지한 듯 괴로운 듯, 경건한 듯 숙연한 듯, 짙고 옅은 주름살로 잔뜩 찌푸려진 미간!

뜬금없이 오스트리아 유학시절 방문했던 중세풍 봉쇄수도원이 떠오른다. 겨울철 어느 추운 날 우리를 반겨준 것은 차디찬 석조 건물들이었다. 첫눈에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동료 신학생의 안내를 따라 둘러본 행랑과 경당 등 내부 시설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혹한기 고행을 위하여 일부러 모든 의자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난방을 위한 설비가 생략되었던 것! 지금은 아니지만 중세시절 수사들의 평균 수명이 잦은 동상으로 채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는 신학생의 설명에 주변의 음산한 회색빛 기운이 겹쳐져 그 수려한 건축물이 마치 교도소에 와 있는 듯 느껴졌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왜 그곳의 수도자들은 고신극기를 수도생활의 핵심 방편으로 여겼을까? 한 마디로 그것은 순수 그리스도교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유산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리스도교는 성경의 긍정적인 육신관과 복음 영성을 따르기 때문에 고행보다 기쁨을 강조한다. 반면에, 초기 동방교회에 유입된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만 긍정적으로 여기고 육신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수도생활의 목표를 육신 다스리기에 두었다. 바로 이런 비그리스도교적 관점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맥락 안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새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들 영성 내지 신앙 관련 서적에서도 그 이교적 유산의 편린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 영향으로 여전히 우리 신자들 표정에는 ‘오이지’ 인상이 역력한 것이고.

다시금 확인하거니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알속 역시 기쁨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렇게 ‘오이지’ 인상의 청산을 해학적으로 주문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요지로 초기 교회 교부들이 ‘육신의 부활’ 신앙을 전수시키고자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이제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대단원에 이르러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로 이어진다. 이는 라틴어로 ‘카르니스 레수렉씨오넴’(carnis resurrectionem)이다. ‘카르니스’는 ‘육신’을 ‘레수렉씨오넴’은 ‘부활’을 뜻한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다음은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사도신경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사실 ‘영원한 삶’은 나중에 추가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은 결국 같은 얘기다. 육신이 부활했으니까 영원한 삶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얘기인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해서 쓰는가? 이유가 있다.

육신의 부활을 얘기할 때는, “이 세상에서 이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방점이 있다. 반면, 영원한 삶은 “그러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야 할까, 죽음 너머의 무엇을 희망해야 할까”에 방점이 있다. 결국 강조점이 다른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의미 공감을 꾀해 보자.

■ 영혼과 육체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반면, 초세기부터 이를 부정하는 이단이 많이 있어 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자였다. 그들은 출발부터 육신을 악의 원천이며 죄 덩어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육신이 부활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다. 대신 참되고 선한 것은 오로지 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사실은 가짜 육신을 취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가현설’(假現說)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부활도 육체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영’이 영광스럽게 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렇다면 인간 영혼과 육체는 서로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이 인간에 대한 물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물음이 풀리면 다른 물음도 함께 풀린다.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의 문제도 결국은 이 물음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나와 있는 주장을 구분하여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인간은 결국 ‘물질적인 존재’라고 보는 ‘유물론’의 관점이다. 이 관점의 주창자들은 인간의 지성, 정신, 영혼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물질’이 거듭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본다. 단백질 덩어리가 고도로 진화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명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육신’ 생명이 수명을 다하면 인간의 ‘정신’도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실컷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이들의 인생관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영혼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육체는 악하고 유한하다는 ‘이원론’의 관점이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 철학자들의 동조자들인 이원론자들은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요 속박이며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영혼은 이성의 힘으로 육체에 얽매여 있는 욕망을 극복해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결국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은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서 고행을 장려하였다. 영지주의도 이러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서 생겨난 것이었다.

끝으로,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로서 인간을 보는 관점이다. 성경은 인간을 철저하게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 본다. 이는 일원론적 인간관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육체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토마스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살펴본 두 번째 주장인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이 널리 퍼져 있던 중세의 분위기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은 분명하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다.

성경이 표방하고 있는 육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놓쳐버리면 육신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원수 곧 삼구(三仇: 육신, 세상, 마귀) 중 하나로 간주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매양 슬픈 표정으로 제 몸에 밥도 안 주고, 잠도 안 재우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재우고 하는 극단에 기울게 된다. 그러니 무슨 수준 높은 영성 좇는답시고, 고신극기하며 피골이 상접해 지는 일은 지양할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분명히 생명과 기쁨과 평화를 주셨음을 늘 잊지 말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가톨릭신문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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