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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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52) 눈물도 슬픔도 없으리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만사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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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담 한 말씀

싱글로 살겠다고 잔뜩 마음먹은 노처녀에게 “올해는 꼭 시집가거라!”라고 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학교성적 노이로제에 걸린 학생에게 “새해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 좀 올려야지!” 한다면.

별 방법을 다 써 봐도 체중감량이 안 되어서 괴로워 죽겠는 과체중의 당사자에게 “살 좀 빼서 날씬해지렴”한다면…….

선의에서 해준 덕담이 되레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음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덕담도 상대의 사정을 헤아려 가면서 해 주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2014년 새해 벽두. 들은 덕담과 건넨 덕담들! 서로 좋은 뜻으로 여기고 고마워하며 마음에 간직하기를 소망해 본다. 차제에 애독자들에게 새해 덕담 한 말씀 드리고 싶다. 만년 오드리 헵번의 번득이는 지혜를 빌려본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정열을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던 오드리 헵번. 그녀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이 똑 부러진 말에 무슨 토를 달랴. 한 해 양식으로 모자람이 없으리라. ‘유언’이라는 사실을 부각하여 깊이 음미해 보면, ‘부활’을 내다본 안목까지 서려있는 듯도 하다.

■ 그리스도인의 부활

지난 글에서 왜 하필이면 ‘육신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육신관’을 짚어봤다. 이제 부활과 관련하여 남는 문제들을 점검해 볼 차례다.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할 때, 그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의 부활을 가리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6.20).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는 논리다. 만약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부활할 것이다”라고 믿으면 이는 너무 막연하다. 기대일 뿐 확신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되살아나셨다. 우리 눈에 보였다. 분명히 돌아가셨고, 분명히 시체가 됐고, 3일 뒤면 시체가 썩어야 됐는데 그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보고서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 희망을 신명나게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1베드 1,3-4).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부활의 권한을 ‘상속’받았다. 증서도 있다. 이 증서는 어디서 발급받는가? 본당 사무실이다. 바로 세례 증서다. 이 증서만 가져다 내면, 상속 권한을 찾을 수 있다. 스위스 비밀은행은 돈 예치는 쉬워도 찾을 때 무척 까다롭다고 한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도 까다롭지 않다. 증서 하나만 딱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부활’이란 어떤 것일까? 사도 바오로는 장차 우리가 가질 육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2-44).

한마디로 이 세상 육신과는 차원이 다른 육신으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곧 여기서는 썩는데 저 쪽에 가서는 그 몸이 썩지 않는 것이 된다. 약한데 강한 것으로 되고, 물질적인 몸인데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시체’는 무엇이고 ‘주검’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이들은 3차원 세계에 남겨진 ‘몸’의 존재 양식일 뿐이다. 본 육체는 고스란히 저 세상의 존재방식으로 둔갑하여 옮겨간다. 저 세상은 3차원보다 훨씬 고차원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저 세상이 몇 차원인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물리학계에서 파악된 차원은 11차원이라고 한다. 여하튼 인간은 저 미지의 차원으로 가면서 이미 ‘새로운 육신’을 입게 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씨앗’의 변화로 설명한다.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십니다. 씨앗 하나하나에 고유한 몸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6.38.42.52-53).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마치 씨앗이 죽어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하듯이 ‘육체적인 몸’이 죽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육체적인 몸이 3차원 공간의 몸이라면 ‘영적인 몸’은 부활한 자의 몸이다.

요컨대, 몸의 부활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육신이 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갔다는 말이다.

■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교황 요한 23세는 돌아가시기 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 여행채비는 끝났다.”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가고 싶다”는 말이다. 누군들 여행을 신나고 설레어 하면서 가지, 마지못해 끌려가겠는가. 교황은 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 역시 육신의 부활을 믿었다. 이 육신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던 육신이다. 고통을 겪던 육신이다. 슬픔을 느끼던 육신이다. 이 육신이 부활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세상. 묵시록은 그 세상이 미구에 도래할 것을 예고한다.

과연 그 나라는 어디 있는가. 물론 죽음 저 너머의 세상이 그런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도 고달플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 말씀에 희망의 단서가 있다. 바로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라는 대목이다. 이 말씀은 ‘지금’ ‘이미’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 때, 이미 지상에서 저 꿈의 세상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만사 오케이다. 아니 ‘내’가 주님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 나라는 이미 ‘나’와 함께 있다. 왜?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임마누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2014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맞게 될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모두가 한낱 신기루가 될 뿐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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