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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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55) 영원한 삶의 양태

어떤 고통에도 주님 안에서 기쁨 누리는 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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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죽으리라는 것을 알라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인 나에게 ‘미래’는 매양 일터이면서 일구월심 짝사랑이면서 예수님 말씀마따나 예고 없이 찾아올 도둑이다. 그리하여 미래는 나에게 언제나 못 다한 ‘숙제’다.

그런데 2013년, 이 숙제의 테두리에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불쑥 들어오셨다. 재임기간 채 1년도 안 되는 교황에게 그분의 인기를 반영하듯 여러 별칭들이 붙여졌지만, 나는 교황에게 79세라는 고령에 어울리지 않게 ‘교회의 미래’라는 이름을 봉정하고 싶다. 거의 연일 터트리는 교황의 ‘한 방’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될 일이기에 굳이 그 까닭을 밝힐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교황의 이른바 ‘돌출’ 언행의 영적 의중은 2,000년 교회사의 유구한 전통의 빛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 나에게 부과된 연구의 본령을 다하기 위해 작년 하반기부터 교황의 영성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조만간 방송 특강과 저술로 나눔이 있을 계획인데, 여하튼 그 과정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에 이르러 잠깐 감동에 머문 적이 있다. 바로 교황의 신앙 형성에 할머니의 지혜가 대물림되어 녹아 있었다는 사실! 교황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할머니의 영향에 대해 언급한다. 그 가운데 ‘죽음’에 관해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자에게 각인시켜준 지혜는 가히 압권이다.

“하느님이 너를 보고 계심을 알라. 지금도 너를 보고 계심을 알라. 언제인지 모르지만 너도 죽으리라는 것을 알라.”

이 구절이 적힌 종이를 할머니는 침대 옆 탁자 유리 밑에 깔아 놓고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읽으셨단다. 교황은 할머니가 이탈리아의 어느 묘지에서 읽었다며 들려주었던 문장도 70년의 세월을 무색케 하며 상기한다.

“지나가는 이여, 멈춰서 너의 발걸음과 걷는 속도를, 너의 마지막 걸음을 생각해보라.”

채 열 살이 안 된 손자는 이런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적어도 인생의 끝을 생각하며 긴 호흡으로 사는 법을 어느새 궁리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손자 멘토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9년 12월 13일 그가 사제품을 받던 날, 할머니는 이후 그의 영적 이정표가 될 축복의 말을 한 장의 편지글로 남겨준다.

“나는 너희들이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언젠가 질병이 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고통스런 나날들이 닥쳐 낙담케 되거든 가장 흠숭하올 순교자가 모셔진 감실 앞에서 마리아의 길고 긴 숨을 떠올려 보도록 해라. 거기 십자가 아래 마리아의 시선이 머문 곳을, 그 깊고 형언할 수 없이 쓰라린 깊은 상처 위에 한 방울의 향유(눈물)도 흘릴 수 없었던 성모를 기억하렴.”(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이 친필 유훈을 교황은 성무일도 안에 넣어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생의 끝을 직면하는 슬픔에 처할 때, 감실 안 ‘가장 흠숭하올 순교자’ 예수님 앞에 앉아, 바로 그 자리에서 먼저 그리고 지금은 그 곁에서 함께, 차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면서 비탄을 빚어 의탁의 긴 숨을 토하는 성모의 현존을 잊지 말라!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할머니의 육성에 젊은 사제는 매일 성무일도를 펼칠 때마다 어떤 기도에 잠겼을까.

■ 두 가지 궁금한 물음

이제 지난주에 이어 ‘영원한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춰볼 차례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흔히 들었음직한 두 가지 궁금한 물음이 있다. 이에 대해 소상히 교회의 가르침을 짚어보기로 하자.

첫 번째 물음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정말 지옥을 만드셨을까”다.

이 물음에 관련하여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성경은 지옥을 ‘유황불’이 들끓고 있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었다. “저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고민한 결과 가톨릭교회는 다음의 결론을 취하였다.

곧 지옥은 불이 활활 타거나 사람을 질식시키는 그런 장소(라틴어: locus)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처하는 고통의 상태(라틴어: status)를 말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께서 일부러 지옥을 만들려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옥의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는 얘기다.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기를 고집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고통이며 심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선택으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초래하는 고통이다.

두 번째 물음은 “연옥은 정말 있는가”다.

이 물음에 대하여 가톨릭교회는 ‘연옥’이 있다고 가르친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마카베오기 하권에 기초하고 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유다인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우상의 패’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성전(聖戰)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은 의로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유다는 이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만일 ‘천국’과 ‘지옥’밖에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의인 아니면 악인, 곧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분명히 판가름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전사자들은 안타깝게도 ‘반쪽 의인’들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반쪽 의인’인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淨化)의 단계를 연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교회의 오랜 전통은 연옥이 실재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1030항)

요지는 무엇인가. 지옥이건, 연옥이건, 천국이건 인테리어 공사가 된 ‘장소’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셋 중 하나는 우리가 죽어서 맞닥뜨릴 실재가 아니라 이미 지상에서 누리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 된다. 어떤 고통 중에도 하느님 현존에 안겨 기쁨을 누리는 연습! 이것이 오늘과 내일 내가 누릴 셋 중 하나를 가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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