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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비추어라] 교황명 ‘프란치스코’ 성인

평화와 가난의 정신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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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곧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개표가 끝날 때까지 숱한 전쟁을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성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내 마음으로 들어온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직후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교황은 또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분이자 평화로운 분이었으며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하고 보호하셨다”면서 “평화와 가난한 이를 위하는 정신을 가르쳐주셨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교황의 발언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콘클라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브라질의 우메스 추기경이 새 교황에게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라고 부탁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가진 첫 교황은 이렇게 탄생했다.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성인의 복음적 영성과 철저한 청빈을 닮고자 한 것이다.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그림)는 너그러움,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심,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으로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명이다. 1926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를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까지 불렀다.

부유한 직물업자의 아들로 자유분방하고 야심 많은 청년기를 보낸 프란치스코는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23세에 회심했다. 2년 뒤 아시시 근처 산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자각했고, 1209년에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창설했다. 회원들은 복음 정신을 따라 세상에서 이방인과 함께 순례자로 살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편지와 훈시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선교를 위해 시리아(1212년)와 스페인(1213∼1214년), 근동지역(1219년)까지 여행했다. 틈날 때마다 외딴곳에서 혼자 기도하며 명상했다. 그의 기도 생활과 선교 활동은 풍성한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고, 특히 모든 자연과의 교감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성인의 놀라운 보편적 형제애를 보여줬다.

말년은 아시시 근방에서 보냈는데 눈이 먼 데다가 중병을 앓았다. 1226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그는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10월 4일이다.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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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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