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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비추어라] 124위 시복, 한국교회 약사

선교사 아닌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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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설립 초기 신자들은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림은 ‘명례방 집회’.(김태 작, 1984년)

1784년 2월 이승훈(베드로)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는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용(요한)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교회의 설립은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이승훈은 10명의 평신도를 신부로 임명하고 성사를 집전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성(瀆聖)임을 알게 된 교회 지도자들은 윤유일(바오로)을 북경교회로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귀국하면서 천주교가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는 1791년 신해박해(진산사건)를 일으켰고, 이때 체포된 두 사람은 참수되었다.

1794년 말, 신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교리 연구 및 선교를 위하여 설립된 명도회를 통해 사목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을 당시 4000명이던 신자 수는 1800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관련되어 윤유일,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 등이 순교하였고, 1797년에는 충청도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나 이도기(바오로), 박취득(라우렌시오)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1801년에는 조선 조정에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강완숙(골롬바)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황사영(알렉시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흩어져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박해가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교황청에서는 1831년 조선 포교지를 조선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 마가자에서 병사했고, 그 후 1836년에 모방 신부가, 1837년에는 샤스탕 신부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각각 조선에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은 1836년 말에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해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냈다. 또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매괴회, 성의회 등 신심 단체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선교사 3명과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김대건이 1845년에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1846년의 병오박해 때 현석문(가롤로),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1849년에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전국의 교우촌 순방, 순교자 행적 조사, 한글로 된 교회 서적 편찬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1861년 병사하였다.

한편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많은 선교사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선교사들은 사목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55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59년쯤부터는 서울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기도서, 신심서, 교리서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1857년에는 1만 5206명, 1861년에는 1만 8035명, 1865년에는 2만 3000명으로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성장해 가던 한국 천주교회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다시 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 12명 가운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순교하였다. 또한 남종삼(요한), 홍봉주(토마스),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 등도 순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선교사들은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사목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앙의 자유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1888년 진주에서 윤봉문(요셉)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박해령에 따른 천주교 탄압은 더 이상 없었다.

제공=교황방한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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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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