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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0주기‘혜화동 할아버지’이자 ‘시대의 등불’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생애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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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을 꼽았다.


▲ 해외 휴가 중 공원에서 그네를 타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김수환 추기경.


▲ 김수환 추기경이 2005년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찾아 법정스님의 손을 잡고 천주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불의에 맞서며 ‘시대의 양심’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현실의 벽에 막힐 때면 “제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며 밤새 고뇌하며 기도했다. 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늘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들의 아픔을 품에 안았다. 사진 속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억들이다.

 

 

옹기장수 막내아들로 태어나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김영석(요셉)과 서중하(마르티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자랐기에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성품이 곧고 신앙심이 독실했던 어머니는 두 아들(동한, 수환)을 훌륭한 사제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소년 김수환은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전쟁에 다녀온 뒤 귀국해서 학업을 마무리 짓고 신부가 됐다. 첫 부임지인 안동성당 등지에서 보낸 4년여 세월,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한 추억은 가슴 깊이 남았다. 50년 넘는 성직 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으면 “신자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본당신부 시절”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하지만 시대는 민중의 아픔을 함께할 목자를 원했다.

 

▲ 자화상 ‘바보야’를 그리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탄압을 피해 명동대성당으로 들어온 300여 명의 대학생을 지키기 위해 당시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학생들을 연행하려면 먼저 나를 밟고 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 바오로 6세 교황에게 추기경 반지를 받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 한국을 방문한 데레사 수녀(오른쪽)와 함께 있는 김수환 추기경.


▲ 가르멜 수도원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이 바이올린을 켜는 흉내를 내며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된 추기경

그는 마산교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의지를 안팎으로 뚜렷이 밝혔다. 보수 성향 원로 사제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참으로 각별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 주민들을 자주 찾아가고, 빈민사목 관계자들과 유달리 가깝게 지낸 데서도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려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기쁜 마음으로 산동네와 소규모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좀 더 몸을 낮춰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것을 늘 후회했다.
 

한번은 난지도를 방문해 조촐한 저녁상이 들어오자 “이 역한 냄새 가운데 어떻게 여기서 늘 음식을 먹지?”라고 무심코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 괜찮다”는 수녀의 대답에 김 추기경은 자괴감 어린 침묵에 빠졌다. 빈민가에 가서 빈민과 더불어 먹고 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는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을 더없는 부끄러움으로 고백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혜화동 신학교 내 사제관에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으며 강연, 미사 집전 등으로 바쁜 여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큰 어른으로 추켜세웠지만 어쩌면 ‘혜화동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리는 ‘밥’이 되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여전히 눈앞의 이익을 쫓기 바쁜 우리를 ‘바보’의 삶으로 초대한다.


백영민 기자heelen@cpbc.co.kr

 

▲ 염수정 추기경이 2009년 2월 19일 김수환 추기경 입관 예절에서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며 성수를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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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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