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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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로 만난 하느님] (8) ‘참 얼굴’을 담은 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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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초상은 ‘사람의 손으로 그려지지 않았다’(Acheiropoietos, 아케이로포이에토스)는 전설과 그로부터 전래된 ‘베로니카의 수건’이라는 주제에서 시작된다. 이 전설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얼굴 모습을 천 위에 남긴 기적을 일컫는다. 베로니카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중세부터 바로크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그려지던 미술의 중요한 주제였다. 예수께서 골고타(해골산) 언덕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발걸음을 옮기지만, 결국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한 여인이 예수께 다가와 자신의 머릿수건을 풀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 예수님의 얼굴이 여인의 수건에 새겨졌다.

■ 베로니카의 수건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수건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만 그리거나,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얼굴에 맺힌 고통스러운 피와 땀을 닦아드린 것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 장면과 함께 나타난다.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진 수건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은 본래 두 폭 제대화로 왼쪽은 성 요한의 모습이, 오른쪽은 성녀 베로니카의 모습이 담겨 있다. 플랑드르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 1435년경~1494)의 작품은 15세기 북유럽 회화의 감탄할 만한 사실주의적 묘사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해석해 표현했다.

그림 속 자연 풍경은 매우 인위적이지만, 엄격하리만큼 정확하게 묘사하며 리얼리즘을 구사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뒤로 굽이굽이 이어진 들판과 산, 푸른 하늘과 연결된 도시는 중앙의 베로니카와 그리스도의 얼굴과 조화를 이룬다. 화가는 질서정연한 공간 속에 베로니카의 의상을 성모 마리아처럼 붉은색과 푸른색을 입은 여인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상징성을 부여했다.

멤링의 사실주의적 기법은 베로니카가 앉은 바닥에 표현된 풀잎과 꽃의 세부 묘사를 비롯해 머릿수건과 옷 주름,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수건의 주름 등에서 매우 충실히 처리됐다. 그러나 이상하게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주름의 흔적이 전혀 없다. 마치 주름 접힌 수건에 예수님이 어디선가 나타나 얼굴만 수건 위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건의 주름을 따라 예수님의 얼굴이 구겨져 있다고 상상해 보자. 화가는 나름대로 베로니카 수건의 성스러운 기적을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시사하고자 한 것이다. 이 까닭에 화가들이 그린 그리스도의 얼굴은 ‘성스러운 얼굴’(Volto Santo)이라고도 불린다.

사실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풍경과 인물은 세부적인 묘사를 선호하는 북유럽의 감각을 드러낸다. 화가는 우리가 두 눈을 지그시 아래로 향한 성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수건 속 성스러운 존재인 예수님과 만나도록 인도한다.


■ 성스러운 얼굴을 담은 수건

성녀 베로니카가 실존 인물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름을 풀어보면 ‘참 얼굴’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라틴말 ‘베로니카’는 베라(vera, 참, 진실한)와 이콘(icon, 형상)의 합성어다. 따라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참(진실한) 얼굴을 담은 천’이라 말할 수 있다.

‘베로니카의 수건’이라는 도상(圖像)은 중세 말기 전성기를 맞았지만, 후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 스페인의 엘 그레코나 수르바란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다만 이들의 작품에서는 중세시대 인간의 애틋하고 친밀한 감정보다는 절제된 감정이 드러난다.

스페인 바로크 최고의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이를 손꼽으라면 프란치스코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을 거명할 수 있다. 주로 세비야에서 활약했던 그는 오래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의뢰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도나 성인·성녀, 수도자들의 기적이나, 환상·황홀경에 빠진 몽환적 비전이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돼 있으며, 이를 통해 작품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특히 수르바란은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거장인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테네브리즘(Tenebrism, 명암대조기법)에 스페인의 종교적 감수성을 결합해 최고의 영성 미술을 발전시켰다. 그래선지 수르바란의 작품에는 화가 자신의 강렬한 신앙심마저 느껴진다.

그가 그린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은 짙은 검은색 벽에 흰색 천이 네 모서리로 고정돼 있다. 작품에는 이 주제를 말하는 베로니카도 없고, 수건을 들고 있는 천사들도 배제된 채 고통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련히 남아 있다. 전형적인 바로크 회화의 ‘눈속임 기법’(trompe-l’oeil, 트롱프뢰유), 즉 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철저한 사실적 묘사를 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수난을 더욱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기법이다.

수건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은 흐릿한 황색의 모노톤으로 핏기라고는 전혀 없이 창백하다. 뚜렷하지 않아서 더 애처롭고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은 고통스럽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성화(聖畵)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하게 살고 그들이 보는 그림들을 본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자극한다. 이처럼 이 작품 속 그리스도의 얼굴은 전혀 온기가 없고 푸른 기가 돌 만큼 창백하고 해쓱하기에 더욱 가슴에 묻히고 오래 기억하고픈 것은 아닌지.



윤인복 교수
(아기 예수의 데레사·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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