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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요원들이 수습한 유해를 관에 넣어 태극기로 덮고 있다. |
1951년 5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강원도 홍천군 ‘북방한계전투지역’ 유해발굴 현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험했다. 1000m에 육박하는 험준한 산을 깎아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차를 타고 20여 분을 달려 현장 지휘소에 도착했다. 현장으로 가는 도중 도로 곳곳에는 “전쟁의 상처를 간직하고 잠들어 계신 선배님들, 그 아픔의 상처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현장 지휘소에는 녹슨 M1 소총 탄피와 구멍 난 수통, 대검, 탄약 클립 등 발굴 현장에서 나온 물건들이 전시돼 있어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느끼게 했다.
‘변가터’ 발굴 현장은 현장지휘소에서 도보로 다시 가파른 산길을 따라 15~20분 정도를 더 가야 했다. 이미 현장은 교통호, 그리고 호와 호를 연결하는 통로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다. 통상 유해 발굴은 교통호 등 병력이 있었던 곳을 먼저 파서 탄피, 수통 등 그곳에서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면 정밀 조사로 전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유해가 나오면 전면 발굴을 하게 되는데 전면 발굴은 유해가 나온 주변 지역 전체를 다 파서 확인하는 방식이다.
변가터는 바로 전면 발굴을 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지난 3일 유해 3구가 발견됐다. 오전 11시 40분쯤 두개골 조각이 발견됐고 오후 1시 20분쯤에는 또 다른 장소에서 아래턱뼈가, 오후 3시에는 정강이뼈가 각각 발견됐다. 현재 11기계화보병사단 천마대대 장병들이 유해가 발굴된 교통호 아래 50여 미터 지점부터 일렬로 서서 산등성이를 향해 땅을 파헤치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해를 찾기 위한 또 다른 고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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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발굴단원들이 발굴된 유해를 신체별로 분류하고 있다. |
유해발굴에 투입된 장병들이 유해 흔적을 발견하면 그다음 작업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몫이다. 유해가 나온 호는 좌우 1.5m 정도의 공간에 두 사람이 앉아서 작업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정리돼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 모양이 그려진 방수포를 바닥에 놓고 유해발굴단 요원 2명이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어 수습된 뼈 중에서 머리뼈로 추정되는 조각은 두개골이 그려진 부분에, 척추뼈로 추정되는 뼈는 척추 부근에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68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생각보다 출토되는 뼈의 양은 많지 않았다.
대신 중공(중국)군이 썼던 탄피, 당시 미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M1 소총 탄 클립, 총기 소제용 기름통, 수류탄 뚜껑, 판초 우의 조각, 미군 전투식량 숟가락, 찌그러진 일본 동전과 조선 동전이 함께 나왔다. 군 관계자는 “사망자가 기념품으로 소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전이 찌그러져 있는 것으로 미뤄 박격포탄 공격 등 외부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6·25 전쟁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북으로 쫓겨 가자 중국은 한반도에 군을 투입했고 1951년 5월에는 3개 야전군 70만 명을 동원해 유엔군과 국군을 공격하는 제5차 공세를 시작했다. 변가터에서는 1951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미 2사단 38연대 3대대 장병들이 중공군 제15군의 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인근 800고지인 벙커힐에 미군들이 24시간 동안 105mm 포탄 1만 2000발을 쏘며 고지를 사수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유해 수습을 마치자 유해발굴단 소속 장병 두 명이 유해를 유골함에 담고 현장에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작업을 했다.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가운데 오도록 하고 양쪽 끝에 밴드로 조이는 방식으로 능숙하게 마무리했다. 이날 수습된 유해는 노제를 지내고 유해 임시보관소인 11사단 상승관에 안치했다가 국방부 유해발굴단 전문 감식반이 DNA 감식 등의 신원 확인을 하게 된다. 유해가 국군으로 판정되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만, 미군이나 중공군이면 미국과 중국에 인도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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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북방한계전투지역에서 발견된 구멍난 수통 |
‘북방한계전투지역’ 유해발굴 현장에는 11기계화보병사단 천마대대 장병 130여 명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전문요원이 6월 3일부터 7월 26일까지 8주간의 일정으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천마대대 김부경 중령은 “화랑부대 장병들이 사명감을 갖고 발굴하고 있다”며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의 유해를 반드시 발굴해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11기보사단은 지난 2014년 27구를 비롯해 2015년 91구, 2016년 47구, 2017년 29구, 2018년 2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현장에서 만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 류수은 상사는 “양구 백석산 전투에서 잃은 부하들의 유해를 찾으려고 했던 고 서정열 이등중사를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 서정열 이등중사는 1951년 9월 백석산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해 폐에 관통상을 입는 중상을 당했고 함께 싸웠던 통신병 등 부하를 잃었다. 이런 한이 남아 있어 매년 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갖고 백석산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부하들의 유해는 발견하지 못했다. 류수은 팀장은 “그런 분들이 있어서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며 “선배님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게 빚을 갚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현장지휘소로 돌아가려면 60도 이상의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야 한다. 6월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강원도 깊은 산길에는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3구의 유해가 확인된 변가터 등 북방한계전투지역 현장에서 남은 발굴 기간에 얼마나 더 많은 유해가 발굴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해는 6·25 전쟁 발발 69주년이자 전쟁의 포성이 사라진 지 66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유해발굴 현장에서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