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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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늦지 않았음을

김수경(로사,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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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의 장녀로 살아오면서 커지는 것은 책임감이었으며 필요한 것은 기댈 곳이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한 가정의 빈자리를 맏딸로서, 언니로서, 누나로서 지켜온 나의 삶은 “내일 아침 눈을 안 떴으면….” 습관이 되어버린 이 한마디로 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닫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일상은 꽤 오래전부터 외로웠고 숨이 턱에 찰 만큼 버거웠다. 어느 날은 이 작은 몸뚱어리에 이만큼 많은 눈물이 담겨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소리 내 우는 날도 있곤 했었다. 그렇게 마흔 중반에 들어 31년을 모시던 아버지를 갑작스레 어머니처럼 떠나 보낸 후 강단 있다는 내가, 야무지다는 내가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수개월 전부터 사업상 경영의 어려움에 처했었고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자금으로 결국은 파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된 자녀가 셋이나 있었지만, 아버지는 혼자서 어떻게든 막아보려 고민하다가 스트레스였을까.

‘심장마비.’ 지금도 그 단어만 떠올리면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난다. 심장마비로 한겨울 새벽, 동네 공원에서 쓰러지시고 그렇게 아무런 말씀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엄마 곁으로 떠나셨다. 엄마는 꽃 같은 나이에 우리 손을 놓으시더니 100세 시대라는 요즘 예순하고도 여덟 해 살고 가버리신 가엾은 아버지 때문에 난 너무도 가슴이 아리고 아렸다. 소문난 효녀였던 나는 분명 아버지께 잘해드린 것도 많았을 텐데 그런 기억은 깜깜하고 아버지 가슴을 후벼 파고 아프게 했던 못된 기억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병이 있으셨던 것도 아니고 혼자서 부도난 회사를 회생시키려고 애쓰고 고민만 하시다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가엾은 우리 아빠…. 삼우제를 모시고 돌아온 집에는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빨간 딱지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거실바닥은 구두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책임감으로 무장했던 버거운 삶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내 삶은 ‘상속 포기’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50여 평의 아파트에서 달랑 옷가지 몇 벌만 챙겨 하루아침에 작은 원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부모 두 분이 안 계신 마흔셋의 나이도 고아라면 고아였다. 고아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서럽고 두려운 것임에도 주변 사람들은 내게 한마디씩 가볍게 던지곤 했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 언제까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우울해 하고 있을래?” “동생들은 잘사는데 넌 왜 그래?’ ‘누구나 부모는 먼저 떠나 보내. 순서만 다른 거야.” 위로인지 질책인지 모를 소리만 늘어놓자 나는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누나로 언니로 살았던 나는 삶의 회오리 속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힘들어하는데 건사할 가족들이 있고 기댈 수 있는 가정이란 울타리가 있는 두 동생은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서 그런대로 잘 견디는 듯싶었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하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억울함, 서러움은 그렇게나 강했던,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내 영혼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엄마가 안 계신 집안의 안쓰러운 어린 두 동생을 위해, 젊은 시절 혼자 되신 가엾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이라면 희생일 수 있고 맏딸로서 해야 할 도리라면 도리일 수 있었던 지난 긴 세월에 대한 허무함과 배신감, 억울함이 어떤 날에는 분노로까지 이어져 난 그렇게 내 마음에 단단한 자물쇠를 채우고 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흰 어쩌면 그렇게 말짱해?” “난 너희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너희는 내가 밥을 먹는지 죽을 먹는지 어쩜 그렇게도 관심이 없어!” “너희는 결혼할 때 너희 몫으로 챙겨 받았지만 난 지금 아무것도 쥐어진 게 없어, 이게 장녀로서 살아온 30년 내 인생이야! 보상은 하나도 없어.”

분노였다. 억울함이었다. 울화였다. 난 그렇게 2009년 한해를 앓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 해에 있었던 기억들이 하얗게 지워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 울며 지내고 억울해 하고 분해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아버지를 보내고 두어 달 만에 152cm의 작은 키에서 몸무게가 18kg이 빠지고 이가 부서져 빠지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혼자서 병이 들어가는 나를 보다 못한 남동생이 종합병원의 정신의학과에 데려가 상담을 받게 했다. 담당 의사는 내게 몇 마디 말을 걸고 정말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를 나누더니 결국은 폐쇄병동이란 곳에 가두어버렸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냥 난 그렇게 갇혔다. 그건 어쩜 내가 원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내가 정상으로 보이는 게 싫어 의사의 질문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쩜 담당 의사의 소견은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수렁 속에 빠진 듯 혼란스러운 내게 필요했던 공간은 세상을 향해 절대 문이 열리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입원한 병실에는 겉으로 보기엔 별 증상이 없는 사람들이 늘 길게 줄을 서서 약을 탔다. 아침이면 한 움큼씩 약을 먹고, 점심이면 또 그만큼의 약을 먹고, 저녁에는 더 많은 약을 먹고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잠이 든다. 정상적인 사람들 속에서 정상인으로 멀쩡하게 살아야 했던 내가 그곳에서는 멀쩡하지 않아도 되어서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곳이 편해졌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시 세상 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퇴원 역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난 분명 정상이 아닌데 난 약을 먹어야 잘 수 있는데….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게 갑자기 숨이 막혀오고 두려워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도 줄곧 힘들어하는 내게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싫은 게 아니라 사람이 싫었다. 몇 번을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던 어느 날, 그래도 아픈 나를 끔찍하게 챙겨주는 친구에게 내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다 정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일종의 불안감까지 생겨 선뜻 내가 먼저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게 된다. “미안해, 그동안 그냥 일이 많았어. 오랜만이다. 그래 보자.”

반 년만인가.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는 늘 그랬던 것처럼 편안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도 좀처럼 종교 얘기를 늘어놓는다거나 성당 얘기를 잘 꺼내지 않던 친구가 “수경아, 너 성당 한번 나가봐라” 하며 툭 한마디 건넨다. “성당? 성모 마리아 믿는데?” “성모 마리아를 믿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지. 성모님은 너의 기도를 같이 빌어주는 분이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주님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성당 하면 성모 마리아 아닌가? “누굴 믿으라는 거야? 무슨 기도를 같이 빌어줘?” 아버지가 개신교 신자이셨기 때문에 교회는 몇 번 끌려가(?) 본 적이 있었으나 도저히 난 종교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뿐, 평소에도 ‘무교’라고 떠들어댔던 나였기에 개신교도 천주교도 어렵기만 했다.

“네가 싫으면 굳이 갈 필요는 없지만, 그냥 가톨릭 신자가 아닌 평범한 수경이로 미사 드리면서 사람들 틈에서 앉아만 있다 와도 네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여태껏 아버지랑 동생들 뒤치다꺼리만 했는데 너도 기댈 곳은 하나 있어야지.”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데다가 왜 사람들은 힘이 든다고 하면 교회를 가라, 성당을 가라 하는지 그 자리가 불편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전의 다른 친구들처럼 “이번 주 주일에 데리러 갈게, 나랑 꼭 같이 교회 가자”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넌 왜 너랑 같이 가자고 안 해?”라고 묻자 친구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어이구, 그냥 네가 가고 싶을 때 너희 동네 성당 한번 가보라고.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봐”라며 가방에서 불교의 염주 같은 나무알맹이가 엮여 있는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묵주야. 지금은 그냥 네 손에 쥐고만 있어. 힘들 때마다 꺼내서 쥐어봐. 많은 의지가 될 거야.” “이게 뭔데? 목걸인가? 이걸로 뭘 어쩌라고?” 친구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난 주머니에 넣은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친구의 말처럼 그냥 내게 힘이 되어주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외투 주머니에서 친구가 건넨 묵주를 발견했다. ‘힘들 때 의지가 된다고?’ 뭔가 소중한 물건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묵주를 손에 쥐어보다가 문득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동네는 성당이 어디 있지? 한번 찾아볼까?” 그렇게 해서 난 집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동네 성당을 알게 되었고 교리도 받지 않은 채 일요일 오전이면 사람들 틈에 섞여 미사에 참석했다.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나고….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였지만 왜 그랬을까. 그 엄숙한 분위기가 전혀 싫지 않았다. 때론 알지도 못하는 성가를 따라 부르면서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신자였지만 난 이미 나도 모르게 주님께 다가가고 성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주님! 제게 지금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마리아님, 제 곁에 머물러주소서.” 내 믿음의 시작은 엉성하고 어설펐지만 난 그렇게 신앙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리도 안 받고 세례명도 없이 성당을 기웃거리며 주일마다 챙겨 온 주보를 뜻도 모르면서 형광펜으로 줄까지 그어가며 꼼꼼히 읽어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주님’과 ‘마리아’를 번갈아가며 불러대곤 했다.
 

이상한 것은 성경도 없이 성가집도 없이 오직 친구가 건네준 묵주 하나만을 갖고 성당을 가고 혼잣말로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는 거였다.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걸까. 내게 필요했던 건 예전의 물질적인 풍요도,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이었던 게 아닐까. 난 아마도 주님을 만나는 것에 많이 목말라 있었던 듯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더 이상 아파하기 싫고 동생들에게 끝까지 언니, 누나로서 친정이 되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누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죽을 거 아니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무섭고 어렵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말 그대로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안 먹으며 주변에 민폐 안 끼치고 손 내밀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버티고 버텼다. 때론 무심한 동생들에게 서운함이 어찌 없으랴만…. “그래, 동생들한테 서운해 하지 말자. 너희라도 나한테 손 안 벌리고 살 만큼 사니 얼마나 다행이니. 내게 도와달라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인데. 너희라도 잘 먹고 잘살아라, 그게 나를 도와주는 거다”라고 수없이 나 자신을 세뇌하며 난 그렇게 하늘 아래 땅 위에서 혼자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견뎌갔다.
 

그렇게 맨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정말 안 자고 안 먹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세 번의 이사를 거쳐 원룸 생활 7년 만에 작지만 이사 걱정없는 내 이름으로 된 지금의 오피스텔을 마련하게 됐다. 내가 이사 다니며 살았던 원룸 동네를 벗어나 차로 지나다 보면 깨끗하고 높은 건물의 이 오피스텔이 눈에 띄었는데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몇 번씩 돌아보던 그 건물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을 마친 어두운 저녁 내비게이션이 꺼진 탓에 길을 잘못 들어 일산 동네를 헤매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야? 와 본 것 같기도 하고….” 꽤 오래 살았던 지역이라 낮이면 웬만한 거리는 알 텐데 어두운 밤이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시력이 워낙 나쁜 편인 데다가 이제 노안까지 겹쳐 군데군데 켜진 몇 개의 가로등만으로는 도로 식별이 어려웠는데 순간, 저편에서 노르스름하면서도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 삽화=장희원

 

형광등도 아니고 가로등도 아니고 수은등도 아니고 어릴 적 우리 가족 다섯 명이 도란도란 살던 파란 대문집의 거실 전등 같은, 아니 그 거실 전등의 노란색 불빛이 내 시야에 담기면서 그 빛은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한쪽에는 빨래를 겨 캐고 계시는 엄마, 물끄러미 TV 뉴스를 보시는 아빠…. 성탄절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신 장난감으로 기차놀이를 하는 우리 3남매의 유년시절이 차창 밖으로 그려졌다. 너무 오랜만이다. 반갑구나. 내 어린 시절. 잊지 않고 있었구나, 소중하고 귀한 우리 가족의 일상….
 

건물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서야 그곳이 성당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당에서 흘러나온 유년시절 기억 속의 그 불빛. 잠깐의 신호대기 중에서 난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을,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가슴 한쪽에 머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게 그 환한 빛을 안겨준 그 성당은 바로 ‘정발산 성모성탄성당’이었고 그곳은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어 몇 번이나 등록하려 마음만 먹었던 우리 구역의 성당이었다.
 

다음날 막연하게 성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 성당 다니고 싶은데요. 교회랑은 다르다던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물론 친절한 답변이 들려왔고 난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로, 그리고 노란 불빛의 성당이 ‘우리 성당’이 될 것이란 믿음을 굳혔다.
 

몇 년 전 내게 성당 다니기를 권유했던 친구가 생각이 나 연락을 해 만나게 되었다. “이제 집도 생기고 건강도 되찾아서 네가 전에 말한 것처럼 이제 정식으로 나도 성당 다녀볼까 하고…. 나도 어디 하나 기댈 데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친구는 조심스레 “교리가 6개월인데 그건 하느님과의 약속이고 성당과의 약속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칠 수 있으면 시작하는 게 어때 수경아?” “걱정 마, 뭐든지 때가 있다잖아, 나 지금이 그때인 거 같아. 너도 알잖아? 내가 절도 다녀보고 교회도 가보고 너 따라서 성당도 앉아있다 와 보고…. 그때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어. 솔직히 인제 와서 말이지만 그땐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아무 생각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달라. 나, 성당 다닐래.”
 

개신교 친구는 더러 있지만, 천주교를 믿는 친구는 내 주변에 흔치 않아 난 그 친구의 ‘아지아’라는 특이한 세례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세례명이 ‘아지아’ 맞지? 난 뭐로 지을까? 내가 찾아보니까 예쁜 이름 많더라. 비비안나, 율리아, 아녜스~ 참, 김태희 세례명은 뭐야? 나 그걸로 할까 봐.”
 

철없는 내 말을 듣고 친구는 한참을 웃으며 “교리부터 끝내고 세례받기 전에 그때 지어도 늦지 않아. 사실 내가 전부터 네 세례명으로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해. ‘로사!’ 모르겠어, 널 보면서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로사’. 나 역시 ‘로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낯설지 않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되뇌게 되었다. “‘로사’ ‘로사’ ‘김 로사’….”
 

“약속할게. 교리 열심히 받고 꼭 세례받아서 ‘로사’로 다시 태어날게. 이제 반 바퀴 돈 인생. 아직 반 바퀴 남았잖아.” 친구에게 한 약속이었지만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며 다짐이기도 했다.
 

몇 해 전인가. 믿음이 어설펐던 그때 친구가 쥐여준 묵주가 무엇인지 그 의미도 모른 채 받아오긴 했지만 6개월간의 교리를 들으면서 그때 친구가 소중한 묵주를 왜 내게 건넸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교리를 끝내고 2017년 8월 13일, 세례명 ‘로사’로, 그리고 우리 성당의 가족으로, 하느님의 딸로, 지금은 레지오의 단원으로…. 그렇게 나는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시간은 짧지만 내가 직접 성당의 문을 두드려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가꾸게 된 것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성령’ 그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지금부터 시작인 것을 감사히 여기며….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아직도 새내기라면 새내기인 천주교 신자로 어설프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난 아직도 내가 가톨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할 게 더 많다는 사실이 기쁘고 아는 이 한 명 없던 동네에 대모님이 계시고 내 마음이 아닌 그런 마음 허한 날에도 찾아가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있어 많은 의지가 된다.
 

불안하고 서럽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조용히 묵주를 잡게 되며 묵주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령’이나 ‘은혜’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며 내가 여기기 나름이다. 그래서 난 오늘 하루도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하루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내 주변 모든 이들의 평화를 빌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수경(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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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6-2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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