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경(로사,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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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외투 주머니에서
친구가 건넨 묵주를 발견했다. ‘힘들 때 의지가 된다고?’ 뭔가 소중한 물건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묵주를 손에 쥐어보다가 문득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동네는 성당이 어디 있지? 한번 찾아볼까?” 그렇게 해서 난 집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동네 성당을 알게 되었고 교리도 받지 않은 채 일요일 오전이면
사람들 틈에 섞여 미사에 참석했다.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나고….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였지만 왜 그랬을까. 그 엄숙한 분위기가 전혀 싫지 않았다. 때론 알지도
못하는 성가를 따라 부르면서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신자였지만 난 이미 나도 모르게 주님께 다가가고 성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주님! 제게 지금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마리아님,
제 곁에 머물러주소서.” 내 믿음의 시작은 엉성하고 어설펐지만 난 그렇게 신앙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리도 안 받고 세례명도 없이 성당을 기웃거리며 주일마다 챙겨
온 주보를 뜻도 모르면서 형광펜으로 줄까지 그어가며 꼼꼼히 읽어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주님’과 ‘마리아’를 번갈아가며 불러대곤 했다.
이상한 것은 성경도 없이 성가집도 없이 오직 친구가
건네준 묵주 하나만을 갖고 성당을 가고 혼잣말로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는 거였다.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던 걸까. 내게 필요했던 건 예전의 물질적인
풍요도,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이었던 게 아닐까. 난 아마도 주님을
만나는 것에 많이 목말라 있었던 듯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더 이상 아파하기 싫고 동생들에게
끝까지 언니, 누나로서 친정이 되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누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죽을 거 아니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무섭고 어렵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말 그대로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안 먹으며 주변에
민폐 안 끼치고 손 내밀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버티고 버텼다. 때론 무심한
동생들에게 서운함이 어찌 없으랴만…. “그래, 동생들한테 서운해 하지 말자. 너희라도
나한테 손 안 벌리고 살 만큼 사니 얼마나 다행이니. 내게 도와달라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인데. 너희라도 잘 먹고 잘살아라, 그게 나를 도와주는 거다”라고
수없이 나 자신을 세뇌하며 난 그렇게 하늘 아래 땅 위에서 혼자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견뎌갔다.
그렇게 맨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정말 안 자고
안 먹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세 번의 이사를 거쳐 원룸 생활 7년 만에 작지만 이사
걱정없는 내 이름으로 된 지금의 오피스텔을 마련하게 됐다. 내가 이사 다니며 살았던
원룸 동네를 벗어나 차로 지나다 보면 깨끗하고 높은 건물의 이 오피스텔이 눈에
띄었는데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몇 번씩 돌아보던 그 건물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을 마친 어두운 저녁 내비게이션이
꺼진 탓에 길을 잘못 들어 일산 동네를 헤매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야? 와 본 것
같기도 하고….” 꽤 오래 살았던 지역이라 낮이면 웬만한 거리는 알 텐데 어두운
밤이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시력이 워낙 나쁜 편인 데다가 이제 노안까지 겹쳐 군데군데
켜진 몇 개의 가로등만으로는 도로 식별이 어려웠는데 순간, 저편에서 노르스름하면서도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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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장희원 |
형광등도 아니고 가로등도 아니고 수은등도 아니고
어릴 적 우리 가족 다섯 명이 도란도란 살던 파란 대문집의 거실 전등 같은, 아니
그 거실 전등의 노란색 불빛이 내 시야에 담기면서 그 빛은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한쪽에는 빨래를 겨 캐고 계시는 엄마, 물끄러미 TV 뉴스를 보시는 아빠….
성탄절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신 장난감으로 기차놀이를 하는 우리 3남매의
유년시절이 차창 밖으로 그려졌다. 너무 오랜만이다. 반갑구나. 내 어린 시절. 잊지
않고 있었구나, 소중하고 귀한 우리 가족의 일상….
건물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서야 그곳이 성당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당에서 흘러나온 유년시절 기억 속의 그 불빛. 잠깐의 신호대기
중에서 난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을,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가슴 한쪽에 머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게 그 환한 빛을 안겨준 그 성당은 바로 ‘정발산 성모성탄성당’이었고
그곳은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어 몇 번이나 등록하려 마음만 먹었던 우리
구역의 성당이었다.
다음날 막연하게 성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 성당
다니고 싶은데요. 교회랑은 다르다던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물론 친절한 답변이 들려왔고 난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로, 그리고 노란 불빛의 성당이
‘우리 성당’이 될 것이란 믿음을 굳혔다.
몇 년 전 내게 성당 다니기를 권유했던 친구가 생각이
나 연락을 해 만나게 되었다. “이제 집도 생기고 건강도 되찾아서 네가 전에 말한
것처럼 이제 정식으로 나도 성당 다녀볼까 하고…. 나도 어디 하나 기댈 데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친구는 조심스레 “교리가 6개월인데
그건 하느님과의 약속이고 성당과의 약속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칠 수 있으면
시작하는 게 어때 수경아?” “걱정 마, 뭐든지 때가 있다잖아, 나 지금이 그때인
거 같아. 너도 알잖아? 내가 절도 다녀보고 교회도 가보고 너 따라서 성당도 앉아있다
와 보고…. 그때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어. 솔직히 인제 와서 말이지만 그땐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아무 생각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달라. 나, 성당 다닐래.”
개신교 친구는 더러 있지만, 천주교를 믿는 친구는
내 주변에 흔치 않아 난 그 친구의 ‘아지아’라는 특이한 세례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세례명이 ‘아지아’ 맞지? 난 뭐로 지을까? 내가 찾아보니까 예쁜 이름 많더라.
비비안나, 율리아, 아녜스~ 참, 김태희 세례명은 뭐야? 나 그걸로 할까 봐.”
철없는 내 말을 듣고 친구는 한참을 웃으며 “교리부터
끝내고 세례받기 전에 그때 지어도 늦지 않아. 사실 내가 전부터 네 세례명으로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해. ‘로사!’ 모르겠어, 널 보면서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로사’. 나 역시 ‘로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낯설지 않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되뇌게 되었다. “‘로사’ ‘로사’
‘김 로사’….”
“약속할게. 교리 열심히 받고 꼭 세례받아서 ‘로사’로
다시 태어날게. 이제 반 바퀴 돈 인생. 아직 반 바퀴 남았잖아.” 친구에게 한 약속이었지만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며 다짐이기도 했다.
몇 해 전인가. 믿음이 어설펐던 그때 친구가 쥐여준
묵주가 무엇인지 그 의미도 모른 채 받아오긴 했지만 6개월간의 교리를 들으면서
그때 친구가 소중한 묵주를 왜 내게 건넸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교리를 끝내고 2017년 8월 13일, 세례명 ‘로사’로, 그리고 우리 성당의
가족으로, 하느님의 딸로, 지금은 레지오의 단원으로…. 그렇게 나는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시간은 짧지만 내가 직접
성당의 문을 두드려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가꾸게 된 것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성령’
그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지금부터 시작인 것을 감사히 여기며….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아직도 새내기라면 새내기인
천주교 신자로 어설프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난 아직도 내가 가톨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할 게 더 많다는 사실이 기쁘고 아는 이 한 명 없던
동네에 대모님이 계시고 내 마음이 아닌 그런 마음 허한 날에도 찾아가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있어 많은 의지가 된다.
불안하고 서럽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조용히 묵주를
잡게 되며 묵주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령’이나 ‘은혜’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며 내가 여기기 나름이다. 그래서
난 오늘 하루도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하루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내 주변
모든 이들의 평화를 빌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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