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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 황석지 베드로·이에에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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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지(베드로, 1767?~1833)

황석지는 충청도 홍주 당산리의 양반 출신으로 경기도 수원 샘골에서 살았으며 ‘사윤’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39세 때 이웃인 김취득(1816년 순교)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입교 후 술을 끊고 결점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1821년 아내와 네 아이를 차례로 잃은 후 그는 서울 아현에 사는 조카 황안드레아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의 조카는 오래전부터 교회를 위해 북경을 왕래하거나 교우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조카를 도와 선교 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1833년 10월 좌포도청 포교(捕校)들이 황안드레아를 잡기 위해 아현 집을 습격했다. 마침 조카는 없었고 대신 황석지가 체포됐다.

그는 감옥에서도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압수된 책과 성물은 모두 황석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라고 시켰다. 그러자 옥에 갇힌 신자가 아닌 다른 죄수들도 그에게 감화를 받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황석지는 1833년 11월 어느 날 형조 옥에서 병을 얻어 갑자기 선종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한 죄수는 “황석지가 세상을 떠날 때 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쳤다. 그의 감방에 찬란한 광채가 비치고, 비둘기 한 마리가 방 안을 돌고 있었다. 그 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숨졌다”고 증언했다.



▨ 이에메렌시아(1801~1839)

이에메렌시아는 충청도 예산 고을의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혼인할 때까지 천주교를 알지 못했다. 20살 무렵 친정 오빠 이순빈(베드로)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이후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에메렌시아는 교회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미신 행위를 끊고 신앙생활에 충실했다. 그러자 그의 남편은 몹시 분노해 그를 학대했다. 남편은 가끔 손발을 쓰지 못할 정도로 그를 때렸고, 추운 겨울에 집에서 내쫓거나 옷을 벗겨 눈 속에 여러 시간을 매달아 두기도 했다. 이러한 학대가 5~6년 동안 계속됐다.

이에메렌시아는 성격이 유순하고 겸손해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이웃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의 진심 어린 행동에 남편도 탄복해 학대한 것을 후회하며 천주교를 믿게 됐다. 부부는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산속으로 이주해 살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에메렌시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 있던 오빠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6월 서울에서 파견된 포교들이 수리산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이에메렌시아는 교우들과 함께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그는 포도청에서 가혹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았다. 첫 번째 문초 때에 50대, 두 번째 문초 때에 70대, 세 번째 문초 때에도 50대의 곤장을 맞았다. 이 때문에 그의 살은 썩어 구더기가 살 정도가 됐다.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은 그의 기력을 더욱 쇠하게 했다. 이에메렌시아는 마지막으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옥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현재 이에메렌시아의 유해는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돼 있다.

정리=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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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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