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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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167곳 성지, 두 발로 걸으며 마음으로 순교 선조 만나 순교 영성 새기며 ‘순례 삼매경’

''성지순례 이렇게 한다’ 완주자들이 전하는 성지순례 방법과 추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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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저마다의 성지순례 방법으로 여러 차례 완주에 성공한 신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자가 은둔하며 신앙을 지켰던 울산 울주군의 죽림굴이다. 리길재 기자


▲ 전국 성지로 순례하고 완주한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순례 문화와 순례 영성도 점점 성숙해지는 양상을 띤다. 사진은 배론성지 전경. 가톨릭평화신문 DB



 한국 천주교회엔 167곳의 거룩한 땅, ‘성지’가 있다. 성지는 신앙 선조들이 남긴 믿음의 흔적이다. 크나큰 하느님 사랑을 처음 접한 이들의 신심이 어찌 이리 강건했던 걸까. 가족과 떨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겪고 삶의 터전까지 버리고 산속에 숨어들어 가는 한이 있어도…. 급기야는 짐승 취급당하며 포승줄에 묶인 채 주리가 틀리고, 목이 잘려도… “나는 주님을 섬깁니다”라고 고백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그들의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의 성지는 167권의 ‘작은 성경’이다. 그런 순교자들의 큰 믿음과 주님 사랑의 마음을 따르고자 전국 성지 순례를 완주한 이들에게서 신앙 선조들을 만나는 순례 방법과 마음가짐을 들어봤다. 이들은 나름대로 추천할 만한 성지를 꼽아주기도 했다. 평신도 신앙 선조들이 일군 한국 교회 영성의 토대 위에서 오늘의 평신도들이 순교 영성과 신심을 새롭게 일구고 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강민주(요안나, 64, 대전교구 태안본당)

▲ 강민주씨(맨 앞줄)

성지순례요?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을걸요. 혼자서도, 둘이나 셋이 가도 좋은 게 성지순례입니다. 저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옹기그릇 장사를 하셔서, 어릴 때부터 순교자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111곳 성지를 한번 완주하는 데 2년 걸렸네요. 매주 수요일이면 남편에게 가게를 맡기고 무조건 순례길에 올랐거든요. 최근 167곳으로 재지정된 성지를 순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지로 향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는 걸 느낍니다. 머나먼 한국 땅에서 순교하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저는 사치스럽게 사는 건 아닐까 반성도 하게 됩니다. 제게 성지순례는 죽어야 끝난다고 할까요? 그만큼 성지순례는 신앙생활의 큰 부분이 됐어요. 성지에 오가는 길에 핀 꽃도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움이라 여기면 순례를 향하는 길도 기도가 되지요.
 

강민주씨 추천 성지
 

①춘천교구 행정공소(강릉 연곡면) - 은퇴하신 신부님이 상주하고 계셔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답니다. 공소에서 민박도 할 수 있어 묵을 곳을 따로 찾지 않아도 되죠. 아담하고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친정’ 같은 곳입니다.
 

②수원교구 은이성지(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의 김가항성당이 없어져 아쉬웠는데, 이곳에 가면 복원된 김가항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사용하던 유물도 있어 교회사 교육에도 딱입니다.
 

③솔뫼성지(충남 당진시 우강면) -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곳이어서 그분의 영성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곳이죠. 이름대로 소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함께 만끽하며 순례할 수 있어요.




 배웅(야고보, 76, 수원교구 안산본당)

제가 성지순례를 세 번 완주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살았죠. 한동네에 살던 아주머니들이 치마폭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꺼내준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열심히 돈 벌어 그분들께 밥 한 끼라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기도보다 더 큰 보은이 있을까?’ 싶어 전국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제가 가톨릭에 입교한 지 50년째 되던 2012년이 성지순례 첫발을 내디딘 해입니다. 제 승용차 운전석 옆자리를 아예 침상으로 개조해 다녔고, 밥도 차에서 해먹었습니다. ‘노숙 순례’를 자처한 거지요. 성지에서 바칠 기도문을 A4용지 6장에 옮겨 적어 코팅해서 갖고 다녔습니다. 맨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곳이 많았는데, 요즘은 잘 되어 있어 이동하기가 좋아졌습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성지에 가면 복장이 호화스럽거나 러닝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성지에서 달래곤 합니다. 그래선지 순교자 가족 묘소가 있는 성지를 특히 좋아합니다. 나만의 성지, 내 지향과 맞는 성지를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도 좋겠네요. 성지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 성지는 위로의 공간이자, 성당과는 또 다른 영성의 공간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12번 완주가 목푭니다.
 

 

배웅씨 추천 성지

①황경한 묘(제주시 추자면) - 황사영과 정난주 사이에 태어난 황경한의 묘소입니다. 황경한은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한 후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하추자도에 남겨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부의 손에 거두어졌는데, 황경한의 후손이 추자도에 아직 살고 있답니다. 바닷가의 무척 아름답고도 슬픈 곳입니다.
 

②치명자산성지(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 가족 순교자 묘가 있는 곳입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항검과 그의 가족 6위가 합장된 묘가 있지요. 저는 가족에 애착심이 강합니다.
 

③죽림굴(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 하룻밤 자고 오고 싶었던 곳입니다. 금세라도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굴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생활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요.



김달철(베드로, 66, 서울대교구 수서동본당, 시각장애 6급)
 
▲ 시각장애인이지만 순례에 나선 김달철씨(오른쪽에서 두번째)와 교우들

시각장애인도 전국 성지를 완주할 수 있어요. 비용은 좀 더 들었을지 모르겠네요. 장애인 복지 콜택시로 전국을 다녔기 때문이죠. 기사님이 신자였던 덕에 같은 순례 멤버가 돼주셨어요. 그렇게 시각장애인 교우 두 분과 2년 동안 성지를 두 번 완주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앞을 볼 수 있기에 두 분을 양팔에 팔짱을 끼고 안내했어요. 성지는 끈끈한 형제애도 깨닫게 해줍니다. 저희가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가는 곳마다 신부님, 수녀님, 신자분들께서 더 챙겨주신 거죠. 불편함을 전혀 못 느꼈습니다. 순교자 이야기는 성지 해설사님이나 단체 순례 오신 분들 속에 섞여서 들었어요. 청주교구 연풍성지에선 신자분들이 음식까지 대접해주셨어요. 무척 감사했죠. 마음씨 좋은 교우분들 도움이 성지 완주의 큰 힘이었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 가슴을 다시금 떨리게 하는 신앙활동입니다. 박해 때 이 땅의 순교자들의 믿음과 당시 상황을 전해 듣고 떠올릴 때마다 후손으로서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확인했습니다. 성지는 ‘순교자 신앙학교’입니다. 순례 때 성지 미사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꼭 참여하시고, 성지 사제와 해설사를 통해 신앙 선조의 이야기를 꼭 듣고 도장 받길 권합니다.
 

 

김달철씨 추천 성지

①김범우 순교자 성지(경남 밀양시 사기점길) - 김범우는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학 모임을 하다 유배를 당했습니다. 원래 김범우 유배지는 충북 단양으로 알려졌었는데, 1989년 밀양에 묘소를 모시게 됐습니다. 초행이라면 가는 길이 쉽진 않습니다. 이곳에 성모 동굴 성당이 있어 여름철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 좋습니다.
 

②조씨 형제 순교자 묘(부산 강서구 생곡길) -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조석빈ㆍ석증 형제가 묻힌 곳이라 더 와 닿는 곳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형님에 비해 왜소했던 동생이었지만, 형제 모두 똑똑하고 믿음이 무척 굳건했다고 해요.
 

③황경한 묘(제주시 추자면) - 백서 사건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황사영, 어머니 정난주와 떨어져 끝내 홀로 유배지 추자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간직한 곳이죠.



 류지훈(베드로, 75, 부산교구 수정마을본당)·홍수자(베로니카, 68)씨 부부


 

성지순례는 ‘순교자들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성인부터 무명 순교자까지 한분 한분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순례길에 오르면 그냥 여행이 돼버리니까 사전에 인터넷과 신앙 서적을 뒤져서라도 순교자들을 이해하고 가면 좋아요. 저희는 성지 순례하면서 인근 관광지는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순례와 순교자 영성에 집중하기 위해서죠. 공경하는 집안 어른을 뵈러 가는데, 이 정도 정성은 들여야겠죠? 또 부부라면 꼭 같이 순례하길 권합니다.
 

20년 넘게 냉담한 남편과 순례를 다녔는데, 글쎄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던 남편이 순례 후에 배려하는 남자로 180도 변했어요. 제가 성당 일 바쁠 때면 밥과 청소도 척척 해주기도 하고요. 결혼 생활 오래 했지만, 성지순례가 부부 사이를 변화시켜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부부가 함께 순례하면 얻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순례하다 보면 서로 토닥거릴 일도 생겨요. 그런데 성지에서 함께 기도하고 챙기다 보면 어느새 신앙 안에 가까워지는 ‘기적’도 체험할 수 있어요.
 

저는 청양다락골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에서 묘비 하나하나를 기도하며 닦아드렸어요. 성지순례는 이처럼 ‘순교자와 만남’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류지훈ㆍ홍수자씨 부부 추천 성지

①치명자산성지(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 이순이 루갈다·유중철 요한 동정부부의 지극한 덕행과 효심을 들으면 눈물이 절로 나는 성지예요. 가족은 물론, 사돈과 친척까지 따뜻이 챙긴 이순이의 영성이 가득한 곳입니다.
 

②미리내성지(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 김대건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 등 목숨 걸고 그토록 신자들을 위했던 초대 사제들의 마음을 본받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곳이에요.
 

③갈매못 순교성지(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 병인박해 때 다섯 성인의 순교 처형장이었다고 해요. 성지 주변에 조성된 순례길 따라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성인들의 순교 피가 모래사장 아래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요.





김광식(요셉, 63, 인천교구 가좌동본당)·최복순(안나, 62)씨 부부와  큰아들 김병선(베드로, 41)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순교자들에게 미쳤어요. 7년 동안 일곱 번 성지순례를 완주했습니다. 왜냐고요? 그분들께 너무 감사해서요.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랑과 기쁨을 알도록 맨 처음 믿음을 남겨주신 분들이잖아요. 성지를 매년 완주하다 보니 집에 쉴 때엔 뭔가 마음이 가라앉아요. 그럼 또 떠나는 거예요. 순교자들 앞에 가서 그간 잘 계셨는지 문안 인사드리는 마음으로요.
 

성지는 순교자들의 정신과 얼을 채우는 ‘신앙 충전소’입니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큰아들과 함께하는 장거리 순례가 쉽진 않아도, 아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매년 주님 부르심에 손잡고 응답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간혹 ‘도장만 받는 게 성지순례야?’ 하고 우려하는 분도 계시지만, 어찌 됐든 도장 순례자들도 성지를 향한 거잖아요.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 어떤 형식이 됐든 성지라는 거룩한 땅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신앙 활동이라고 봐요.
 

성지 안내판이나 표지가 잘 돼 있지 않은 곳에선 애를 먹을 수 있지만, 그 또한 순례의 한 부분이죠. 하느님을 처음부터 잘 알지 못하듯 처음엔 좀 버벅거려도 지향 한 가지씩만 잘 간직하고 떠나면 됩니다.
 

성지순례는 안일했던 나의 삶을 다시금 일깨우는 ‘믿음의 목욕재계’에 비할 수 있겠네요. 순례는 고통과 부활의 은총을 모두 체험하는 길입니다. 순례의 끝은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란 말씀으로 늘 귀결됩니다. 저희는 성지를 따로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성지가 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땅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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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7-1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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