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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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⑦ 근세 일본교회와 불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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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회는 16세기 유럽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렸다. 이후 교세는 작지만 일본사회의 소외된 이웃들 사이에서 복음의 기쁨을 알리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이세훈(토마스) 상임연구원의 기고를 통해 예수회를 주축으로 한 유럽의 선교사들이 근세 일본의 주축 종교였던 불교와 일본 전통 문화 안에서 어떻게 일본 국민들에게 신앙을 전파했는지 알아본다.


■ 가톨릭교회의 전래와 일본문화

일본교회의 삼중대화는 교황청이나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에서 거론하기 이미 오래 전 가톨릭 전래 초기에 시작됐다. 16세기 후반 전란이 계속되는 전국시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 알레산드로 발리냐노(1539~1606년) 순찰사로 이어지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뱃길을 따라 고아, 말라카, 마카오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들은 일본 현지의 문화에 대한 적응주의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은 아프리카, 인도, 남미, 동남아에서 유럽중심주의 포교활동을 펼치면서, 미개한 현지 주민은 일방적으로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인식한 유럽 우월적 선교방식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16세기 말 일본 인구는 약 1200만 명, 가톨릭 신자 수는 약 40~5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에 달했다. 특히 최전성기인 1580년대에 100명 이상의 서양선교사들이 활동했던 규슈지역은, 전체인구 약 125만 명 중 가톨릭신자가 약 30만 명으로 이 지역 인구의 25%가 가톨릭 신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가 세례를 받으면 영주민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는 당시 일본의 관행으로 보아 신앙심과는 별개로 입교한 사람도 많았고 이 숫자가 상당히 부풀려졌다고 생각되지만, 단기간에 얻은 선교 성과로는 믿기 어려운 놀랄만한 외적 성장이었다.

하지만 신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데 반해, 일본어과 일본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선교사들에게 난감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유럽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신불(神佛)숭배, 천황과 쇼군(將軍)의 지배질서, 그리고 가난한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특유의 풍습과 관행 등 문화적 여러 측면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유럽과 이질적인 혼인문화, 특히 타종교 간의 혼인과 이혼 관습, 첩실의 세례문제 등 간단히 해답을 얻기 어려운 윤리·신학적 난제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타종교 간의 혼인문제는 교회법에서 정하는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일본사회와 문화에 일방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교회법으로는 적절한 구제책을 강구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선교를 위해 발리냐노 순찰사는 교회의 관면을 자문하게 되고, 1612년 트리엔트공의회 교령에 대한 관면을 공포하게 된다.

이외에도 일본의 관습적인 고리대, 살인, 전쟁과 포로, 우상숭배와 미신 등 이질적인 일본문화에서 비롯된 관습들은 선교사들이 쉽게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 일본문화와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사람들은 유사 이래 거듭되는 지진, 화산, 태풍, 쓰나미 등 온갖 자연 재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왔다. 동시에 자연은 생명 유지와 풍요를 가능케 하는 감사와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의 삼라만상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800만의 신, 즉 야오요로즈노가미(八百萬神)라는 독특한 자연신 숭배가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일본 고유의 민족 신앙인 신도(神道)는 800만 신(神)의 정점에 있는 태양신,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인 천황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일상 속에 신사참배를 생활화 했다.

한편 불교는 고대 천황제 중앙집권국가 형성시기인 6세기에 백제로부터 전래됐다. 8세기 나라(奈良)시대에 중국으로부터 화엄종이 들어오고, 중세 헤이안(平安)시대에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이 들어와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과 승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귀족종교의 성격이 강해서, 일반 민중에 대한 포교활동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마쿠라(鎌倉)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서민의 구원을 위한 불교, 즉 알기 쉬운 교리와 단순하고 실천 가능한 서민불교가 퍼져나갔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파가 정토종(淨土宗)이다. 정토종은 아미타불(阿?陀佛)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기만 하면 정토 왕생한다(一向專修)는 신앙운동을 전개해 대중적 호응을 얻었는데, 그 후 아미타불의 본원 믿음(信)을 중시하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죠도신슈)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파생되었다. 유일신적인 정토진종은 서민불교로서 오늘날에도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신도와 불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에서 융합되고, 상호간에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신불습합이 일본사회와 문화, 일반 민중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정착했다.

■ 16세기 가톨릭교회와 불교와의 대화

하비에르 성인이 가고시마에 상륙한 시기에는 군웅할거 하는 영주들 간의 오랜 전란이 계속되면서 일본사회는 혼란스럽고 피폐했다. 일본불교는 정토종과 그로부터 파생된 정토진종이, 전쟁에 지친 사무라이(侍)와 일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세를 확장하고 널리 퍼져나가면서 대중화됐다. 따라서 16세기 일본 가톨릭교회는 불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규슈지역에서 가톨릭이 일찍이 뿌리내린 붕고, 히라토, 아마쿠사 등 주요 지역을 조사한 결과, 이들 지역의 가톨릭 개종자 중 상당수가 정토진종의 불교신자였다. 아미타불을 유일신으로 믿는 정토진종과 가톨릭 교리는 유사성이 있는데, 선교사들은 정토진종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리 용어를 불교교리 용어와 비교해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 입장에서 불교는 무신론에 기초하고 있고 범신론적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토진종의 아미타신앙은 일신교적 사유에 기초하고 있다. 창시자 신란(親鸞)은 아미타를 영원한 빛이라고 칭하고, 인간의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적존재로 이해했다.

일향전수(一向專修)는 바로 이 유일한 아미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신앙이다. 당시의 문서에 정토진종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데우스(Deus, 하느님)는 아미타와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면 서양선교사들은 불교신자인 일본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호칭을 사용했을까? 하비에르 성인이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할 때 안내자였던 진언종 불교신자인 안지로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하느님, 즉 ‘데우스(Deus)’를 일본불교 진언종에서 사용하는 ‘대일(大日如來)’이라고 칭했다. 후일 이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수회는 교리용어로 원어주의를 채택하여 하느님을 라틴어 원어대로 ‘데우스(Deus)’로 호칭했다.

하지만 ‘데우스’라는 용어로도 일본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1580년대 발리냐노 순찰사의 지도 아래, 이제는 어느 정도 일본문화와 일본어를 이해하게 된 서양선교사와 일본 방인수도자가 모여 논의한 끝에 결국 ‘천주(天主)’로 개칭했다. 즉 초기 일본 가톨릭 선교시기 하느님의 호칭은 ‘대일(大日)⇒데우스(Deus)⇒천주(天主)’로 변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세훈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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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7-2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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