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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 -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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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또 다시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이 도마 위에 올라왔다. 자발적인 매춘부였다, 돈을 벌었으니 공생관계였다는 등 망언들이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급기야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에 침을 뱉는 만행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으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피해자 할머니를 만났다. 역사를 바로 세워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들의 궁극적 바람이다. 지워지지 않는 피맺힌 상처에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옥선(안나·93·수원교구 광주 퇴촌본당) 할머니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소장 안신권)에서 만났다.



“성당 다니면 행복하잖아요. 영혼의 구원을 믿으니까, 천국 가고 싶어서 성당에 열심히 다녀요.(웃음)”

8월 18일 만난 이옥선 할머니에게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 이유를 물었더니 소녀처럼 수줍게 웃는다. 수많은 망언과 평화의 소녀상 테러 등으로 잔뜩 우울할 법도 한데…. 소녀같은 미소는 어쩌면 할머니의 시간이 15살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할머니는 15살이던 1942년 7월, 울산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중 어느 남자들 손에 납치됐다. 중국 연길까지 끌려간 할머니는 그때부터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악몽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원통함은 말로 다 못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됐지만,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행여나 자기를 받아주지 않고 내쫓을까 두려웠다. 연길에서 인연을 만나고 가족을 이뤄 살아가던 중, 할머니에게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제가 살던 동네는 시골이었는데, 주민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어요. 성당도 엄청 컸어요. 저도 예전부터 성당에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역사 때문에요. ‘위안부’ 역사 말이에요.”

말 못할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고백이 본당신부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요청으로 한 한국인 수녀가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 수녀는 할머니의 고민을 말끔히 씻어줬다. “강제로 그런 건데 무슨 죄가 있어요? 성당에 갑시다.” 할머니는 1970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안나’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2000년 6월, 할머니는 중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 쭉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고령에 거동이 불편한데도, 할머니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을 다니며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하는 평화 활동가로 살고 있다.

할머니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소녀같던 할머니 얼굴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만 남았다.

“우리는 일본에 당해서 그들이 나쁘다는 걸 잘 알잖아요. 일본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일본정부가 나쁜 거예요. 그런 끔찍한 일을 하고도, 단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요. 일본사람보다 한국사람이 더 미워요. 오히려 한국사람들이 우리보고 끌려간 게 아니라 우리 발로 갔다 하잖아요. 비록 소수가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소수가 다수를 물들이잖아요.”

어떤 말로 그 한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정당하게 사죄를 받고 역사를 정의롭게 바로잡겠다는 신념으로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힘든 싸움을 해나가고 있다.

이 할머니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하느님, 그리고 할머니를 돕는 주변 사람들이다. 고령에 거동이 불편해도, 절대 미사는 빠지지 않는다는 할머니. 할머니는 차량봉사자의 도움으로 나눔의 집에서 약 5㎞ 떨어진 퇴촌본당(주임 임익수 신부)에 나가고 있다.

신앙친구였던 고(故) 김군자(요안나·1926~2017) 할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함께 다녔지만, 지금은 혼자 미사에 참례한다.

“요안나 할머니 살아있을 때가 좋았는데…. 그래도 안 빠지고 성당에 나가요.”

이옥선 할머니는 해외 일정 중에도 반드시 주일을 지킨다고 말했다. 2013년 7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방문했는데, 당시 글렌데일시에 해외 최초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윤석원 가주한미포럼 대표의 도움으로 LA 성삼한인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당시 본당주임이 현 마산교구장인 배기현 주교였다. 배 주교는 당시 성삼한인본당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이 할머니를 격려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니 더 힘을 낼 수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도 고마워요. 우리 편에 서서 일본에게 사죄하라고 말해주잖아요. 일본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법적배상을 할 때까지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 일본군 ‘위안부’ 문제란?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군위안소’를 설립해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해 성노예로 만든 범죄를 일컫는다.

일본군 ‘위안부’ 용어는 1993년 제2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아시아의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이 토론한 결과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따옴표 안에 넣어 표기하기로 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들은 현지에 버려지거나 폭격으로 사망, 혹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고난에 직면해야 했고, 일부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을 포기하기도 했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생존자들은 많은 여성들, 시민들과 손잡으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정부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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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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