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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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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고국 폴란드에 민주화 씨앗 뿌려

[동유럽 신앙 역사를 순례하다] 2.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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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의 성모 수녀회 내 2000년 대희년 기념 성당. 하느님 자비의 상본을 중심으로 좌우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가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 금빛 지구본 감실은 한국에서 봉헌한 작품이다.

 

 
▲ 바도비체의 성모마리아성당(왼쪽)과 바로 옆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생가 박물관.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평생 몸에 두르고 다녔던 흰 스카폴라.

 

 


20세기 유럽은 침략과 전쟁으로 단 하루도 총성이 멎는 날이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념 논쟁으로 동서 간 장벽이 높아만 가던 그때, 바티칸에서 ‘희망의 불꽃’ 한 발이 쏘아 올려졌다. 1978년 10월 16일 전 세계 추기경단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소련 공산권 치하에 있던 폴란드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가 선택된 것이다.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탄생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450여 년 만의 비이탈리아계 출신 교황의 탄생은 이미 그 자체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고향, 바도비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풍경의 폴란드 시골 마을 바도비체. 고요한 마을 분위기가 영적 감수성마저 자극하는 이곳은 1920년 카롤 보이티와가 살았을 때엔 더욱 평온하지 않았을까.

9월 22일 주일 오전. 바도비체 광장 한편에 우뚝 세워진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거룩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 성당은 보이티와가 세례를 받고, 9세 때 첫영성체를 하며 신앙생활의 기초를 닦은 곳이다.

성당 안엔 보이티와가 세례받았던 세례대와 함께 이젠 성인으로서 따스한 미소를 선사하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로 꽉 찼다. 성당에 미처 못 들어간 신자들이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전례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깊은 신심을 엿볼 수 있었다.

성당 바로 옆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당과는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곳에 자리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생가 박물관’이다. 실제 보이티와가 태어나고 자란 가옥인 이곳은 1984년 처음 개방됐으며, 2014년 박물관으로 재개장했다.

생가 박물관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생애와 폴란드 교회사를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의 친필 회고록부터, 선종 때까지 평생 목에 두르고 다녔던 스카폴라, 취미로 즐겼던 스키 도구, 보이티와 가족이 썼던 가재도구 등이 잘 구현돼 있다.

“얘들아, 우리는 한가족이니 나를 ‘신부님’이라 부르지 말고, ‘삼촌’이라고 부르렴.”

사진 속 보이티와 신부는 자신을 에워싼 젊은이들과 부드러운 유머로 늘 함께했다. 당시 공산 치하에선 사제와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양 떼를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잘 읽힌다.

그는 교황이 된 이듬해인 1979년 고국을 처음 찾았다. 그를 환영하는 수많은 인파와 인산인해 속에 봉헌된 교황 주례 미사는 그 자체로 공산 정권에 대한 소리 없는 도전이었다. 공산 정권이 운영하는 방송사들은 교황 방문 소식을 축소 보도했지만, 시민들은 처음 연대의 힘을 알게 됐고, 이후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은 똘똘 뭉친다.

소련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 미하엘 고르바초프는 회고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니었으면 민주화의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을 것”이라고. 1989년 폴란드 해방 때까지 교황은 고국 민주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영웅이었고, 2002년까지 폴란드를 9번이나 방문하며 각별한 고국 사랑을 유지했다. 교황은 1984년과 1989년 ‘순교자의 땅’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하는 등 재위 26년간 총 129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폴란드 교회는 내년 5월 18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연중 행사와 사업을 준비 중이다.



자비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

폴란드 교회사의 중심에는 ‘하느님 자비 영성’이 있다. 가톨릭 신자 97%에 이르는 폴란드 국민들이 열강 침략의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중심에는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1905~1938, 자비의 성모 수녀회)가 전한 자비의 영성이 있다.

크라쿠프 와기에브니키에 자리한 ‘자비의 성모 수녀원’은 생전 280여 회에 이르는 예수님 환시와 가적 계시를 체험한 파우스티나 수녀가 지냈던 자비의 성지다. 곳곳이 그녀가 기적의 환시를 겪은 거룩한 장소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수녀원은 본래 윤락 여성들의 보호처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하느님 자비를 갈구하던 수많은 폴란드인이 파우스티나 수녀의 유해가 모셔진 수녀원을 끊이지 않고 방문하면서 수도원은 문을 개방했고, ‘자비 영성의 산실’이 됐다. 폴란드인들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자비에 마음을 기댄 것이다.

파우스티나 수녀가 예수님에게 받은 메시지는 하느님의 자비 상본을 만들고,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오후 3시에 하느님의 자비 기도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느님 자비의 상본’에 드러난 예수님이 1931년 파우스티나 수녀가 환시를 통해 본 주님이다. 수녀원 내 성당에선 매일 오후 3시마다 상본 원본 앞에서 ‘하느님 자비 기도’가 봉헌된다. 신자들은 매일 3시면 기도를 바치러 성당을 가득 메운다. 수녀원이 온라인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도 중계 때엔 3만여 명이 접속할 정도다. 폴란드 공영방송사는 매 주일 미사를 생중계한다. 수녀원은 미디어 시대에 발맞춰 자비 신심을 전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에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 천년기 첫 성인으로 선포했고, 2001년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했다.

대외 홍보 담당 엘리자벳 시에팍 수녀는 “예수님이 파우스티나 성녀를 통해 전한 자비의 의미는 정의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사랑”이라며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 자비의 땅, 자비의 학교인 수녀원은 출판과 학교 교육, 기도, 순례객 맞이로 파우스티나 영성을 전 세계에 전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폴란드(바도비체, 크라쿠프)=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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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0-1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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