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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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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절 특집]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참석 금했지만 군국주의 막지 못한 교회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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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남산의 조선 신궁에서 신사 참배를 하는 여학생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해방된 지 75년. 그 긴 세월이 흘렀지만, 신사(神社) 참배는 한국 천주교회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신사 참배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는 친일 행각을 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5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교회는 2000년 대희년 12월 과거사 참회 예식을 거행, 신사 참배와 함께 일제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신자들을 단죄한 잘못을 참회했다.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국가 신도’는 금지됐지만,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명맥을 계속 잇고 있다. 군국주의 망령이 일본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국가 신도 또한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려만은 아니다.

한국외방선교회 유가별 신부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학부 통합과정과 석ㆍ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한 뒤 ‘1882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 교회, 교황청 등지의 사료를 기초로 쓴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다. 3ㆍ1절 101주년을 맞으며 유 신부의 논문을 기반으로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 특집을 싣는다.




1920~1930년대 한ㆍ일 교회

1932년 5월,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쿄 조치대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 이에 조치대에 파견됐던 교관은 격분해 이 사건을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고 대학에서 전격 철수한다. 이 사건으로 장교 임용이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조치대 입학 지원자가 격감하고 조치대는 존폐 기로에 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선 사회적으로 반가톨릭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학 측은 다시 교관을 영입하려 했지만, 1933년 12월이 되기까지 불발했다. 신사 참배 허용을 비롯해 일본 국가주의에 충성하겠다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교관 재임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2월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시마에서 일본 국가주의와 신사 참배 요구가 강화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오시마에서 선교 중이던 캐나다 출신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 반국가주의적 행위를 했다는 오명을 썼다. 오시마 주민들은 성당을 약탈했고, 온갖 위협과 폭력에 시달린 끝에 오시마 선교사들은 결국 철수했다. 또한, 오시마의 거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배교를 선언하자 나가사키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허용했고, 일본 주교단 또한 이 지침을 뒤따랐다.

조선은 어땠을까?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바위본당 신자 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교장 지시에 불응해 퇴학당했다. 또한, 1925년 10월 서울 조선신궁(현 서울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 진좌제(鎭座祭, 신령이 내려와 위패에 깃들게 하는 제사 의식)를 전후해 대구 효성여학교(현 효성초등학교)를 비롯한 가톨릭 학교들이 진좌제 관련 행사에 불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문부대신을 만나 “가톨릭교회는 신사 참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이처럼 한국 교회는 일관되게 신사 참배를 우상숭배로 봤고, 참배를 막았다. 1931년 전국 대목구장 공동명의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도 신사 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의 참석을 금지했다.(466항)



한ㆍ일 교회는 왜 신사 참배를 금했나

일본과 한국 교회는 당시 왜 신사 참배를 금지했을까? 신사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셔놓고, 그 신을 재장(齋場)ㆍ교장(敎場)의 성스러운 터전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사 대상이 된 ‘카미’(神)는 자연신을 총칭한 것으로, 포괄적으로는 신화적, 역사적 인물이나 위인, 조상의 영들도 카미로 숭배했고, 이를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정부는 ‘신도 국교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종교계 반발에 부딪히자 ‘신사신도’(神社神道)의 비종교화를 추진한다. 메이지 정부는 1882년 ‘국가 신도화 법령’을 반포, “신사 신도는 국가 제사이지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신도를 종교에서 분리했다. 이후 내무성 산하에는 종교국을, 문부성 산하에는 신사국을 두어 행정적으로 신사신도를 일반 종교의 범주에서 구분시켰다. 동시에 국가 신도는 더는 종교에 해당하지 않기에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1910년대로 접어들며 신사 참배가 가톨릭교회와 얽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국가 공무원의 의례 행위로만 봤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가 1911년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교사 인솔 하에 신사 참배를 할 것을 의무화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입장

이에 따라 교황청과 일본 간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교섭이 이뤄진다. 1916년 필리핀 교황사절 주세페 페트렐리 주교는 늦게나마 1912년 즉위한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일본과 바티칸 간 수교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그의 파견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일본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황청 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이어 이듬해 2차로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페트렐리 주교는 방일 중 나가사키ㆍ도쿄ㆍ하코다테 등지 교구장 주교들과 만나고 일본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로(本野一)와도 접견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신사 참배 관면은 별다른 진전 없이 논의로만 끝나고 만다.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 교회의 노력은 계속됐다. 1919년 일본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야마모토 신치로(山本進次郞)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바티칸과 일본 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티칸과 일본 당국자 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히며 20여 가지의 청원을 담은 편지를 교황청에 보낸다.

이에 따라 교황사절이 파견된다. 초대 주일 교황사절은 이탈리아 출신 푸마소니 비온디 주교(1919∼1921년 재임), 제2대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자르디니 주교(1922∼1931년 재임)였다. 제3ㆍ4대 주일 교황사절은 미국 출신 에드워드 무니 주교(1931∼1933년 재임)와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1933∼1948년 재임)이다. 이 두 주교가 일본의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신사 참배를 위해 메이지 진구(明治神宮) 앞에 모여든 일본 군인들과 일본ㆍ만주간 친선 서약을 하는 사진을 게재한 일본 신문 이미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제사 허용 문제
 

그래도 1920년대까지는 신사 참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데 이어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는 초대 중국 교황사절인 첼소 콘스탄티니 주교에게 요청,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7월 반포한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Ex quo singulari)과 관련해 조상 제사의 문화적 측면을 다시 한 번 논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의 공자 의례 문제와 한ㆍ일 신사 참배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자 의례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ㆍ중ㆍ일 가톨릭교회에서 신사 참배가 허용되는 데 실마리가 되는 회의는 1935년 3월 12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에서 만주국 주재 교황청 대표 오귀스테 가스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주국 주교단의 공자 의례에 관한 회의였다.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제사 중 위패(位牌)에 절하는 문제였는데, 만주국 주교들은 위패에 절하는 문제를 문화적 행위로 보고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청에 보고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이에 따라 1935년 5월 28일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을 인준하고, 공자 의례 예식에 일부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 신자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이어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훈령을 통해 제사와 함께 신사 참배를 전격 허용한다.

 

한ㆍ일 교회의 신사 참배 허용

만주국 주교단의 이 같은 결정은 한ㆍ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독일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대목구장으로 있던 요한네스 로스 주교도 1932년 ‘신사 참배에 관한 교회법적 허용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교회법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영향을 줬다.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서 신사 참배 참여 허용 원리를 찾아냈고,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주교는 이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 참배의 길을 열었다. 무니 주교는 이 논문을 한ㆍ일 주교단에 모두 보내고, 논문을 본 소감을 달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어 도쿄대교구장은 논문의 결론을 도출하고,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 참배가 허용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제시한다. 이 논문을 접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1933년 10월 신사 참배 반대 입장을 바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같이 신사 참배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할 정도로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도쿄 도심 메이지 진구(明治神宮)에 모여든 일본인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한국 교회 내 갈등
 

당시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26년에 펴낸 교리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를 통해 신사 참배를 금지했다. 또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공의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사목 지침서에서도 신사 참배는 금지됐다. 하지만 1932년에 내놓은 「천주교요리」 개정판에서는 입장이 확 달라져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
 

1932년만 해도 서울ㆍ대구ㆍ원산대목구와 평양ㆍ연길지목구 주교단 중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빼고는 모두 신사 참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교들도 입장을 바꾼다. 신사 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던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1935년 갑작스레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 한국의 모든 지역 교회는 신사 참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다.
 

끝까지 반대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월터 콜만 신부와 레오 스위니 신부는 미국으로 소환됐다. 콜만 신부는 탄원서를 교황청 성무성성(현 신앙교리성)에 보냈지만, 초대 주일 교황사절을 지낸 포교성성 장관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이 이를 묵살했다.
 

1933년에 결정된 신사 참배 반대 번복을 교회가 곧바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주교회의 안에서만 공유하다가 번복 사실을 공개한 것은 3년 뒤 「경향잡지」 1936년 4월 호를 통해서였다. 이어 한 달 뒤 포교성성 훈령이 발표되자 한국 주교회의는 신사 참배와 관련된 사목 지침서 조항을 개정, “신사 참배는 애국 행위의 표명”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36년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 조사위원회’를 꾸려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 위원회 역시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사 참배 종언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신사 참배는 사실상 종언을 알린다. 그해 12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국가 신도와 관련된 모든 교육과 지지, 홍보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고 발표한다.
 

신사 참배가 공식 금지된 지 이제 75년이 지났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신사신도’가 ‘국가신도’가 되면서 비롯돼 군국주의 망령 속에서 횡행했던 신사 참배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1995년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평의회가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애국주의라는 미명하에 수용했고,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 국가 신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줬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 허용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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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2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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