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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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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문턱까지 와도 묵주기도 소리는 더 크게 울려퍼져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8) 포화 속에서도 이어진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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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의 성모상. 성모상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쏜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부산교구 범일본당 이성만 주임 신부와 신자들이 1952년 10월 13일 성체 거동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삶과 죽음이 뒤엉킨 전쟁 속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출처=「125년의 역사 속으로 범일성당 화보집 1889~2014」

▲ 1952년 9월 12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제1회 종신서원식을 마친 서원자들과 수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50년사」



한국전쟁 시기엔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북한 공산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신자들과 사제, 수도자들은 죽음 앞에서 더 간절히 기도하며 신앙을 이어갔다. 성모 신심과 순교 신심은 전쟁의 고통을 견뎌내는 원천이었다. 신자들은 묵주 기도를 바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또 공산당으로부터 순교자 유해를 지키며 믿음을 더욱 굳건히 했다. 삶과 죽음이 뒤엉킨 폐허 속에서도 기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성사(聖事)는 이어졌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신자들 모이는 곳마다 기도 소리 끊이지 않아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은 각별하다. 게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에서 해방된 날이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신자들은 이를 성모의 도움과 사랑으로 여겼다. 전쟁 기간에도 신자들은 끊임없이 성모께 기도를 바치며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어떤 좋은 소식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신자들은 체포나 살해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성물을 챙겼다. 가장 먼저 몸에 지닌 건 묵주였다. 심지어 포로로 끌려가던 이들은 셔츠나 옷을 찢어 묵주알을 만들어 묵주 기도를 바쳤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로 다 함께 십자가의 길과 묵주 기도를 드렸다. 누군가 자신의 셔츠나 옷가지를 찢어서 그것으로 봉오리 열 개를 만들면 영락없이 로사리오가 되었다.”(「북한에서의 시련-죽음의 수용소에서 돌아온 독일인 선교사들의 육성 증언」 중에서)

공산군과 인민군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와중에도 천주교 신자 가정에선 식구들이 도망가지 않고 모여 묵주 기도를 바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평양교구 장선흥(1914~1958) 신부는 어느 가정에서 사제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 소리를 듣고 “가슴에 짜릿한 감격을 맛보았다”고 했다.

기적 같은 이야기도 있다. 충북 감곡성당에 있던 성모상을 인민군이 없애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본 본당 신자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 인민군이 성모상을 없애려고 총을 쏘았는데 성모상이 부서지지 않자 사다리를 세워놓고 올라가 그것을 부수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부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민군이 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서 성모상을 쳐다보니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힐책하는 눈초리로 인민군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인민군은 공포에 질려 한 발자국도 더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왔답니다.”(「감곡본당 100년사」 중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들은 방공호에 숨어서도 묵주 기도를 바쳤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자 잠을 잘 때에도 묵주를 꼭 쥐고 잤다. 전주 전동성당에선 성심유치원, 성심여중 학생들이 한데 모여 묵주 기도를 소리 높여 바쳤다.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절규와도 같은 기도 소리가 매일 성당과 마을 일대에 울려 펴졌다.

대구로 피난 온 신자들은 남산동 성모당과 주교좌 계산동성당에 모여 성모께 매달렸다. 계산동성당에선 어느새 기도 시간이 정례화됐다. 신자들은 매일 오후 3~4시면 성당에 모여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휴전을 앞둔 1953년 5월 31일엔 ‘성모님의 군대’라 불리는 레지오 마리애가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처음 도입됐다.



온몸으로 순교자 유해 지켜내

한국 교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았다. 곳곳에서 순교자 현양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성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현양비가 세워졌고 순교 복자의 삶과 신앙을 되새기는 연극도 공연됐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79위 순교 복자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순교 신심이 꽃을 피우려던 때 전쟁이 터졌다.

그동안 수집해뒀던 복자 유해와 자료들은 전쟁 기간 많이 소실되고 파괴됐다. 그럼에도 사제, 수도자, 신자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유해와 자료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도자들은 서울 청파동 수녀원이 폭격당하는 와중에도 순교 복자 유해를 품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했다. 순교복자수녀회는 1946년 방유룡(1900~1986) 신부가 설립했는데, 전쟁 중인 1951년 12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순교 복자 현양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윤형중(1903~1979) 신부가 전쟁 기간 중 순교자 관련 자료를 믿고 맡겼던 곳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였다.

죽음의 행진 중에 숨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도 묵주와 한국 순교자 유해였다. 죽음의 행진에 끌려간 포로들은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두 버렸다. 베아트릭스 수녀에겐 묵주와 순교자 유해는 버릴 물건이 아니라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다.

서울 신학교 신학생들은 1ㆍ4 후퇴 때 성 김대건 신부 유해 머리 부분을 경남 밀양으로 옮겨뒀다. 이후 유해는 휴전 후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에 다시 안치됐다.



전쟁도 막지 못한 신앙 활동

신자들은 피난길에서도 인민군 감시를 피해 신부가 있는 곳이라면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비해 성사를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또 공산군이 짓밟고 간 성당을 복구하고 사제가 없어도 성당에 모여 기도하며 공동체를 꾸려갔다.

“1952년 2월 새로운 주임이 부임할 때까지 당진본당은 공소와 같은 시기를 보내며 전쟁의 아픔을 이겨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으니 여러 교우의 수고로 본당이 다시 자리를 잡아갔다. 이 기간 가장 뜻깊은 움직임은 매일 저녁의 기도 모임이었다. …매일 저녁 신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묵주 기도를 한 후 「천주성교공과」에 있는 만과(저녁기도)를 바쳤다. 사순절에는 십자가의 길도 함께 했다. 기도는 1시간 정도 걸리는데 매일 100여 명이 참석하여 조그만 성당에 가득하였다.”(「천주교 당진본당사 70주년 기념집」 중에서)

전쟁 중에도 본당 설립이 이어지며 신앙 공동체는 늘어났다. 대구 범어본당, 목포 경동본당, 부산 동래본당, 제주 한림본당, 강원 영월본당 등이 1951~1952년 사이에 설립됐다. 1952년 9월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제1회 종신 서원식이 거행됐다. 사제들이 피살, 납치되는 중에도 사제 서품식은 꾸준히 이어졌다.

전국 주교들은 1952년 3월 대구에서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본당 사제들은 신자들이 남아 있는 한 죽을 위험이 있더라도 신자들과 함께 남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또 전쟁 위험이 잦아든 지역에선 교회 건물을 하루빨리 복구하기로 결의했다. 한국 교회는 전쟁 중에도 출판, 교육, 의료, 사회복지 사업 등을 펼치며 교회는 물론 사회를 재건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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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2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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