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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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칼끝으로 천주학 논박… 척사론의 사상적 배경 제공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2.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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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복은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인 1780년대 초 성호학파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천주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자, 천주교를 뜻하는 ‘천학’은 중국에 이미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데 목적을 두고 「천학고」를 저술하였다. 「순암집」 권17에 수록되어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안정복은 「천학고」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계묘년(1783)과 갑진년(1784) 사이로부터, 재기가 있다는 젊은이들이 천학의 주장을 펴서 마치 상제가 친히 내려와 알려주고 시킨 듯이 하였다. 아! 일생 동안 중국 성인의 글만 읽다가 하루아침에 서로를 이끌어서 이단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3년을 배우고 돌아와 그 어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천학고」는 천주학이 중국에 전래된 내력이 이미 오래되었고, 이제 막 시작된 신학문이 결코 아님을 밝히는 데 집필의 목적이 있다. 글에는 알레니(艾儒略)의 「직방외기」,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적힌 한나라 때 이미 천주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밝힌 사실을 제시하였고, 「한서(漢書)」와 「열자(列子)」, 「통전(通典)」, 「북사(北史)」. 「자치통감」, 「홍서(鴻書)」, 「오학편(吾學篇)」, 「명사(明史)」, 「경교고(景敎考)」, 「일지록(日知錄)」, 「속이담(續耳譚)」, 「지봉유설(芝峯類說)」 등 중국 역사서와 관련 문헌을 망라하여,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 전해진 이슬람 문화권 종교의 자취를 낱낱이 찾아 파헤쳤다.

예를 들어 「후한서」에 실린 대진국(大秦國)에 대해 소개한 대목에서, “그 나라의 왕은 일정하지 않아서 어진 이를 선발하여 세운다. 돼지, 개, 나귀, 말 등의 고기를 안 먹고, 국왕과 부모 같은 높은 사람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귀신을 믿지 않고 하늘에 제사 지낼 뿐이다. 그 풍속이 매 7일마다 하루를 쉰다. 이날은 매매도 하지 않고 출납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술을 마시며 종일 노닥거린다”고 한 대목을 인용하고, 나아가 “7일마다 왕이 나와 예배를 올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대중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사람이 살아가기란 몹시 어렵고 하늘의 도리는 쉽지가 않다. 간사하고 잘못되며 겁박하고 훔치는 따위의 잗단 행실과 제멋대로 하는 말로 저만 편하고 남은 위태롭게 하며, 가난한 이를 속이고 천한 이를 못살게 구는 것,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있으면 그 죄가 더없이 크다.’ 이에 온 나라가 교화되어 마치 물 흐르듯 그 말을 따랐다”는 대목을 인용했다.

이밖에 고국(苦國), 고창국(高昌國), 언기국(焉耆國), 조국(漕國), 강거국(康居國), 활국(滑國) 등 고대 문헌에 나오는 동투르키스탄, 타클라마칸과 투르판 일대의 이슬람 국가 관련 기록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7일에 한 번씩 주일을 지키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그들의 종교의식과 핵심 교리,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지방의 내륙 도시 묵덕나(默德那), 즉 메디나(Medinah) 지역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살폈다.



천주학은 새로운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엮었던 권위 있는 역사가로서, 중국 역대 기록에 대한 꼼꼼한 카드 작업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교리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고, 또 “내가 살피건대 개황(開皇) 이후로는 그들의 종교가 중국에 행해져서 건물을 지어 살았다. 도관(道觀)이나 사찰과도 다름이 없었는데 그 종교를 위주로 할 뿐이었다. 회창(會昌) 이후로는 그 종교가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는 등의 언급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이들의 종교가 어느 순간 자연적으로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썼다.

결국, 안정복은 「천학고」에서 천주교가 이미 고대 중국에 들어왔고, 이후로도 그들의 종교가 중국 역사서에 언급된 자취를 따라가며, 천주교가 결코 신학(新學)이 아니고,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진리일 수 없음을 드러내고자 힘썼다. 글을 읽고 나면 안정복의 정보력에 먼저 압도된다. 이 한편의 글을 짓기 위해 그가 준비한 시간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명나라 때 전겸익(錢謙益)과 청초의 고염무(顧炎武) 같은 대학자들이 그들의 허황함을 입증한 증언을 남긴 것도 문헌에 명백하다. 그러니 이 천주학을 무슨 파천황의 새로운 진리인 양 과대 포장하여, 선철(先哲)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앞선 역사가 이미 증명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천주학에 대한 34가지 질문과 응답


이어서 쓴 「천학문답」은 즉문즉답 식으로 혹자의 질문에 자신이 대답하는 문답식 설법으로 천주학에 대한 32가지 질의응답을 전개했다. 부록으로 다시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2차례 문답이 덧붙어, 모두 34가지 질의와 응답을 소개한 장편의 글이다.

앞쪽 질문에는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옛날에도 있었나? 왜 배척하나? 믿으면 왜 안 되나? 천학이란 유학과 어찌 다른가? 예수와 성인이 같지 않은가? 고금에 천학을 말한 자는 어찌 말했는가? 천학의 폐단이 무엇인가? 여기까지는 기본 입장에 대한 설명이다.

이어 천주교 교리를 구성하는 핵심 명제를 차례로 물었다. 현세와 후세란 무엇인가? 천당과 지옥의 주장은 어떠한가? 천학이 현세를 배척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삼구(三仇), 즉 세 가지 원수의 주장이 어째서 잘못인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원조와 재조(再祖)의 주장이란 무엇인가? 서사(西士)의 천학 공부는 어떤 내용인가? 불교가 천학에서 훔쳐갔다는 말이 사실인가? 천학의 역사는 온전한 데 반해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데 사실인가? 서사들의 소견과 역량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중국 성인의 가르침이 천학만 못하다는데 그런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야말로 지극한 인(仁)이 아니겠는가? 주자가 천(天)을 이(理)라 한 주장이 맞는가? 중국 선비들이 어째서 서사의 가르침을 따르는가? 중국의 글에도 천주란 표현이 나오는가? 「열자」에 나오는 서방 성인이 곧 천주가 아닌가? 세례를 받고 별호를 정하는 것은 어떤가? 삼혼설(三魂說)은 어떠한가? 천학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천학에서 말하는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숨돌릴 틈 없이 쏟아지는 질문을 늘어 세워 놓고, 안정복은 중국 고전에서 논거를 끌어오고, 방증 자료를 인용하여 차례로 논박했다. 저들과의 논쟁과 토론에 대비해, 유학 쪽에서 대응할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사명감이 깊게 담긴 글이었다. 논의는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보여준 문답 방식과 질문 내용을 끌어왔다. 조선 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 아래 불교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의 글쓰기와 그 성격이 완전히 똑같다. 예상 가능한 질문의 목록이 모두 공박 되면 그들의 허구성이 환히 밝혀져서 글은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천학의 무리가 이런 주장을 펼치거든 너희는 이렇게 반박하여 그들의 논리에 대항하라는 지침을 내려주려고 작정하고 쓴 글이었다.

안정복이 「천학문답」의 집필을 끝낸 것은 1785년의 가평일(嘉平日)이었다. 그해 일력상 이날은 음력 12월 20일이었다. 그해 3월의 추조적발 사건과 6월 이기양과의 일전을 치른 뒤, 안정복은 서학서를 곁에 쌓아두고서 그들의 교리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을 추출하고, 그들의 설명 방식을 이해한 뒤, 유학의 칼끝으로 그 허점을 파고들어 명쾌한 분해를 시도했던 셈이다.



천주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입장

장강대하로 이어지던 문답이 다 끝나고, 안정복은 다시 부록에서 두 차례의 문답을 더 이었다. 성호 선생도 천주학을 믿었다는데 사실인가? 성호 선생이 마테오 리치를 성인이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안정복은 답변에서 선생의 진의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거짓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들었다는 성호의 말로 성호의 입장을 변호했다.

실제로 성호학파 내부에서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려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 제공자는 바로 성호 자신이었다. 성호의 직계였던 이병휴와 홍유한, 이철환, 이가환 등은 서학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그 제자 권철신과 이기양, 이벽 등이 이 노선을 더욱 발전시켜 신서파의 흐름을 활짝 열었다. 그 반대쪽에 윤병규와 안정복, 황덕일 등 성호 우파의 흐름이 또 그만큼 굳건했다.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서학변」을 지어 성호의 서학론에 대들고, 안정복의 가르침을 받은 안동의 남한조(南漢朝, 1744~1809)가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를 지어 안정복의 입장에 찬동했던 것은 성호의 서학에 대한 태도가 끝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홍유한, 권철신, 이기양 등은 성호의 속내를 읽어 서학에 경사되었고, 안정복 등은 성호의 진의를 앞세워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남인 성호학파가 천주학의 수용과 반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된 배경에는 성호 이익의 어정쩡한 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촘촘한 논의가 필요하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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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10-1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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