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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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4·끝)교회와 신앙의 미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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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하는 인간

거대한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생명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기후 변동이 초래하는 지구 생태의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밀고 갈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 체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와 공동체적 이상(理想)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가 디스토피아적 방향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방식, 세상을 작동하게 하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브뤼노 라투르는 “다가오는 문명에 대한 적절한 준비의 결여”가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진단한다. 미래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새로운 존재양식과 운영체제를 설계하자고 라투르는 제안한다. 협상을 통해 구체적 실행의 방식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행위를 그는 “외교”라고 부른다.(「존재양식의 탐구」, 사월의 책, 2023)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지금 깨어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 대림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상 언제나 전망하는 인간이다. 흔히 종교는 과거, 즉 전통과 역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종교는 아주 초기부터 회고적이면서 전망적이었다.”(마틴 셀리그먼 「전망하는 인간, 호모 프로스펙투스」, 웅진지식하우스, 2021) 그리스도교는 거룩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항상 종말론적 완성을 겨냥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기능했던 방식대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다.”(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세상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충실성보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전망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어려운 길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론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미래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측정할 수 없다. 과거는 현재와 인과 관계로 얽혀 있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마틴 셀리그먼) 하지만 파국을 막고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전망에 따라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조정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 교회와 신앙의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교회와 신앙의 위기를 말한다. 교회 안에서 청소년과 젊은 세대를 발견하기가 점점 어렵다. 그렇다고 노인 세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실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 사목이 실현되는 방식, 교회의 작동체계는 여전히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있다. 위기의 담론은 언론 속에서 소비되고만 있다. 변화와 쇄신을 향해 애써 노력하는 교회 구성원들도 있지만, 교회의 전반적 흐름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음울한 전망이지만 희미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에서 최승자 시인이 포항 어느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동영상을 봤다. 정희진 선생의 새 책 머리말에서 선생의 어머니와 딸의 세례명을 밝혔다. 신앙의 사소한 흔적들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신앙을 향한 갈망이 세상 구석구석에 존재한다는 증거 같았다. 사람들은 신앙을, 공동체(교회)를 여전히 원한다. 단지 오늘의 교회가 그 원의를 채우고 키워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신앙 방식, 새로운 교회 작동체계가 요청된다. 기존의 신앙생활 방식, 기존의 교회 운영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쇄신이 필요하다. 전통으로의 복귀를 통해 위기의 극복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의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연결된다. 하지만 거대한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 미래를 향한 전망과 현재의 성찰이다.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측과 추론을 통해 괜한 호들갑을 떨자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할 수도 있지만 미래의 비전과 전망을 통해 지금 여기의 모습을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하자는 의미다. 불안과 혼돈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믿고 지금 여기서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자는 뜻이다.


■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변화와 쇄신의 말들 역시 그저 담론으로 소비되기만 한다.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구체적 대안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일까. 신앙을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교회를 작동하는 체제의 쇄신은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는 정치적 혁명,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촉진하는 문화적 혁명, 무엇이 더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적합할까. 살아가는 방식과 운영체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의 변화와 교회 운영체제의 변화, 둘 다 겨냥하고 있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을 제안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하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란 없다. 그리스도교의 혁명은 신념과 자세와 생활양식의 변화를 통한 일상의 혁명이다. 진정한 혁명은 인식의 전환, 새로운 상상력,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생각, 문화, 법과 제도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일반적인 순서는 생각과 인식의 변화가 문화의 변화를 초래하고 법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온다. 교회는 정치적 혁명보다 교육과 문화를 통한 변화와 쇄신을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 문화란 넓은 의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신앙 역시 문화가 되어야 한다.(「촉진하는 신학」 8항) 신앙인은 이 혼탁한 세상에서 “용감한 문화적 혁명”(「찬미받으소서」 114항)을 이루어내야 한다.

근본적인 변화는 질문을 새롭게 하고 정직한 생각과 성찰을 나누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대화는 토론이 아니다. 논리적 우위를 점하려는 싸움이 아니다. 정직한 말의 나눔 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모색하는 행위다. 대화는 타자의 변화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지향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경청과 대화에서 시작된다. 정직한 말들을 나누는 대화의 문화를 교회 안에 꽃피게 하자. 신앙의 혁명은 투쟁이 아니라 정직한 대화를 통해 시동된다.

신앙의 문화를 새롭게 형성하자. 함께하는 몇 사람들끼리라도 고유한 신앙의 문화를 만들어가자. 주어진 언어, 기존의 행동 방식이 아닌 새로운 언어, 새로운 행동 방식을 찾아가자. 타성적인 질문에 응답하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재구성하자. 권력과 지위, 성취와 업적이 아니라 신앙과 영성의 넓이와 깊이에 초점을 두는 삶의 문화를 구성하자. 권력자들과 허상의 존재들보다 신앙적 영감을 주는, “옆집의 성인”들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신앙의 혁명은 교육(공부)과 문화(살아가는 방식)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의 신앙 교육과 신앙 문화에 대한 전반적 검토와 재구성이 절실하다.


※그동안 ‘신학서원’을 집필해주신 정희완(요한 사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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