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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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1) 생명의 못자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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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효돈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 사는 한 지인이 작은 식물원을 만들었는데 시간 되면 들러달라는 초대를 받아 지난 12월에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으로 근처까지 가기는 갔는데 눈에 띄는 간판도 없어 주변을 헤매다가 전화 통화를 하고 겨우 찾았다. 이 식물원의 주인은 그리 부자도 아닌데 돈을 벌 생각이 아니라서 관광객을 많이 받지 않고 하루에 한정된 인원만 인터넷으로 예약받는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겨울이라 그런지 식물원인데도 꽃이라고는 한 송이도 피어있지 않았다. 나무들도 몇 그루 되지 않았고 들판의 나지막한 잡풀들이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러 종류 식물의 씨앗을 사방에서 구해 모종을 키우고 제대로 싹을 틔우면 마당에 옮겨심는다고 한다.

입구 쪽에 작은 카페가 있어 차 대접을 받았는데 카페 서쪽으로 크고 시원한 창문이 나 있었다. 전혀 특별할 것도 없이 풀만 무성한 정원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창문 한쪽 꼭대기에는 멀리 눈 덮인 한라산 백록담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이 하도 평화스러워 나도 모르게 궁둥이를 붙이고 한참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식물원을 만든 주인의 의도도 특별히 아름다운 꽃나무를 심어 구경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가득 찬 현대인들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고 쉬어가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만들었단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 물과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 나무와 풀을 만드셨다. 나무와 풀은 땅 위에 출현한 첫 번째 생명체들이다. 식물은 빛과 물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하고 산소를 만들어 땅 위의 다른 많은 생명을 숨 쉬게 하고 자신을 먹이로 내준다. 수명을 다한 다음에는 흙 속에 파묻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또 다음 세대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거름이 된다. 식물은 모든 생명체의 못자리다. 인간들은 식물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고의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동물은 식물에 큰 은혜를 입고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삭막하던 대도시 한복판에도 나무를 여러 그루 심고 이들이 자라 숲을 이루면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는다. 숲은 뜨거운 태양열을 막아주고 대지를 적당한 온도로 유지하고 수분을 저장해 준다. 숲은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면서도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주장도 하지 않는 겸손한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숲을 바라보거나 숲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과학이 알려주는 진화의 역사에서도 식물이 먼저 생겨나고 다음에 동물이 등장한다. 식물군의 출현은 4억 년 전이라고 하는데 인류의 출현은 고작 35만 년 전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나무와 풀들은 까마득한 대선배이고 인간은 진화의 여정에서 제일 마지막에 출현한 막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구생태계에 제일 뒤늦게 등장한 막내 인간이 맏형이자 대선배인 나무와 풀들을 너무 우습게 여긴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려온 풀과 나무에 우리 인간들은 아주 무자비하고 무례한 폭력을 행사해 왔다. 현대인들은 대규모 공업단지, 공장형 농축산단지, 쇼핑센터, 관광 리조트, 골프장, 경기장, 공항, 물류단지 등을 건설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면적의 숲을 끊임없이 베어냈다. 자동차를 발명하고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후에는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로 산하를 메우고 한없이 확장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삼림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지구의 허파라고 일컬어지는 아마존 열대 우림지역에서는 지금도 엄청난 벌목과 방화가 자행되고 대규모 목장을 만들어 소들을 키우고 탄광과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태고로부터 이어온 숲속의 생명체들을 멸종시키고 있다. 최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석한 13살 아마존 선주민 소녀 타이사가 외쳤다. “선주민은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인데 기온이 너무 많이 상승해 농작물의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어요.” 또 “가뭄으로 인해 아마존강과 호수들이 말라가고 있어요.” 그리고 “원래는 마을 주변 강에 물고기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물고기를 찾기 위해 4~5㎞가량을 한참 걸어야 해요.” 또 비선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숲을 태워 산불이 자주 나고 친구들이 호흡기 관련 질환에 많이 노출되어 자주 아프다고 한다.

내가 사는 제주에서도 나무와 숲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에 내 가슴이 옥죄어 오고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제주에 와서 한 가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이 버티고 있는데 등산을 해보면 의외로 원시림 같은 울창한 숲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강수량도 제일 많고 날씨도 온화하여 나무들이 자라기에 좋은 조건인데 왜 아름드리 거목이 빽빽이 자리 잡은 울창한 숲이 없을까 하고 혼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제주교구 원로 신부님과의 대화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1948년 4·3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후 군대와 경찰은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들을 차례로 포위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해안가 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제주의 원로 신부님은 지금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장면이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 장면은 무장대 토벌이 한창이던 시절 한라산 꼭대기까지 불을 질러 숲이 벌겋게 타오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무장대와 그에 동조하는 도민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은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고 그들이 숨을 수 있는 곳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숲을 깡그리 태워버린 것이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1974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86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2002년 제4대 제주교구장에 착좌했으며 이후 2020년까지 교구장직을 맡았다.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상임위원 및 사회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과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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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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