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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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김혜영(사비나, 대전교구 도고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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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 엄마, 푸리가 죽었어.” 남편의 외침에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데크 밑 찬 시멘트 바닥에 푸리가 누워 있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짐승같이 소리를 질렀다. 기이한 사람 울음소리에 놀라 옆집과 앞집에서 뛰어왔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죽음은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진맥진한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살려줘. 우리 푸리 살려줘”하면서.

이웃의 부축을 받으며 정신을 차렸다. “푸리 빨리 데리고 나와. 얼마나 춥겠어.” 한빛 아빠가 푸리를 끌어냈다. 뻣뻣했다. “미안해. 푸리야. 밤새 몸부림쳤을 텐데, 난 그것도 모르고 잤네.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을까?” 우리는 한지로 따뜻하게 감싸서 성모상 앞 꽃밭에 묻었다. 내가 죽는 날까지 곁에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아까 푸리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7년 전, “한빛 엄마, 한빛이 죽.었.어.”하며 짐승같이 울던 전화기 속의 한빛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아들 한빛은 죽어서 전화 소리로 나에게 왔다. 그때와 똑같았다. 어제 저녁까지 푸리는 건강했고 내가 준 밥도 잘 먹었다. 슬프게 울었거나 내 다리를 계속 비벼댔거나 아니면 구석에 숨어있든가 뭔가 평소와 다른 조짐이나 예고가 전혀 없었다.

한빛도 그랬다. 스물일곱의 한빛은 건강했고 본인이 맡은 드라마 신입 PD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던 멋진 청년이었다. 어떠한 조짐도 없었다. 그러나 아들 한빛 프란치스코는 아름다운 10월 드라마가 종영된 다음 날, 자살했다. 메시지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품고 열심히 노력해 드라마 PD가 되었지만, 드라마 제작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폭언, 비정규직 해고 등의 부당한 업무 강요에 분노하고 절망했다. 정규직으로서 관리자로서 외롭게 고민하다가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고 고발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도 어이없이 죽어 나가는데 그까짓 고양이 죽음에 세상 끝난 것처럼 유난을 떤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양이 푸리는 아들이 남긴 유일한 선물이었고 아들과 이어진 끈이었다. 나는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푸리를 안았고 푸리의 깊은 눈빛에서 아들을 보기도 했다. 결국 다들 이렇게 내 곁을 떠나는구나. 그런데 왜 어느 날 갑자기여야 하는가?

그런데 밤 12시가 지나 “한빛 엄마, 푸리가 살아왔어”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푸리가 쏜살같이 2층으로 올라왔다. 나는 울면서 푸리를 껴안았다. “푸리야 고마워. 살아있었구나. 그래. 나한테 준비시간은 줘야지. 이렇게 말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너까지 한빛형처럼 보낼 수 없어. 고마워 살아 돌아와서.” 정말 감사해서 대성통곡을 했다. 데크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 11마리 중 4마리가 푸리와 같은 치즈 무늬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죽었던 거다. 푸리 다리에 묻은 흙을 씻겨주며 “한빛도 이렇게 살아 돌아올지 모르겠네”하니 한빛 아빠가 당황했다. 나는 그 순간에 진짜로 한빛도 푸리처럼 살아 돌아올 것 같았다. “엄마”하고 현관문을 들어설 것 같았다. 한빛 아빠의 그렁그렁한 눈물을 보면서 정신이 들었고 푸리를 껴안은 채 목욕탕 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쉬도록 울었다.

푸리의 공백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7년간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아직도 내 사랑과 보살핌에 못 맡기겠냐는 예수님의 경고를 들었다. 그동안 말로만 ‘주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였다.

“사비나, 안 될 것 같아. ‘하늘의 문’에는 본당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대. 저녁에 신부님과 협의해 본다니까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자매님의 위로에도 나는 아무 간절함이 없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없는데 장지가 어디가 되든 뭔 상관인가? 기도라니? 기도하면 아들이 살아온대? 다 부질없었다. 밤늦게 아들의 복사 시절 얘기를 들으신 주임 신부님께서 ‘하늘의 문’을 허락하셨다는 연락이 왔고, 아들은 첫영성체를 받고 복사를 섰던 의정부 신곡2동성당 봉안당 ‘하늘의 문’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된 후 신곡2동성당에 꼭 가고 싶었다. ‘덕분에 이렇게 잘 컸어요’하고 신곡2동성당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었다. 의정부를 떠난 지 15년이나 지났기에 우리 가족을, 아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꼭 들러야만 할 것 같은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뭐가 그리 바빴는지 미루고 미루었던 그곳을 결국 아들의 유골함을 안고 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그동안 분에 넘치게 모든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우선적으로 왔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어 벌 받은 걸까?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욕심만 채우려고 한 나의 교만함에 철퇴를 내렸나? 별별 자책감이 다 들었다. 그래도 아니다. 아무리 죄가 커도 아들의 죽음으로 엄마를 가르쳐서는 안 되지. 아들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시면서 무슨 자비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인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오묘하다. 아들 대학 친구들이 마련한 오순절과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회사 측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시민단체가 마련한 추모제(2017.7.2.)를 아무 조건 없이 배려해주신 주임 신부님과 무작정 성당 문을 두드렸을 때 지푸라기를 잡게 해주신 협력 신부님께서 따듯하게 안아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들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을까?

노동 관련 사안에 바쁘신 데도 전철을 타고 멀리 도봉동까지 와 우리 가족을 위로해주신 노동사목위 J신부님과 L신부님. 프란치스코를 위해 150단 기도를 하셨다며 그 귀한 묵주를 내 손에 꼬옥 쥐어주신 본당의 B신부님. 진상 규명을 온몸으로 외쳐도 골리앗 같은 괴물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었을 때 횡설수설 면담을 받아주고 힘을 주신 K신부님과 H신부님. 모두가 나에게는 생명의 끈이었다. 단순히 연민이나 측은지심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자비였음을 이제야 사무치게 깨달았다. 정말 신비스럽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중립을 위해 노란 리본을 떼라고 조언을 하자 교황님께서 “엄청난 슬픔 앞에선 중립적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고통과 불의에는 중립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그 슬픔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던 그때 그 말씀에 울컥했고 가슴 뜨겁게 새기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결심했었다. 아들이 떠난 후 월급의 상당 부분을 세월호·빈곤사회연대 등 고통받는 곳에 후원한 것을 알았다. 통장에 찍힌 한 줄 한 줄이 아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아들에게 너와 세례명이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지?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했다면 아들은 지금 내 곁에 있을까?

아들은 유아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선택한 신앙이었지만 스스럼없이 따라주어 기특했고 고마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첫영성체를 하고 6학년까지 복사를 했다. 아들의 복사는 신앙심을 키우고자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솔직히 나의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들이 복사가 된 것이 마치 내 능력인 양 어깨에 힘도 가졌다. 그러니 아들이 복사 서는 날이면 미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자랑스러운 내 아들의 저 거룩한 모습을 다른 신자들이 알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이런 나의 허욕을 아들도 눈치챘는지 중2가 되면서 성당 가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했던 아이가 왜 이렇게 변할까 속상했다. 언젠가는 꼭 물어보리라 했다. 아들은 항상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부끄러운 기억은 더 많다. 나는 겨울 새벽 미사도 거의 함께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저녁에는 내일 같이 가자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일어나기가 싫어 거짓으로 아픈 척 했다. 그러면 아들은 혼자 일어나 칠흑 같은 새벽 속으로 뛰어가곤 했다. 마음이 불편해 베란다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어린 아들을 보면서 ‘어이구 이러고도 엄마냐? 이러고도 복사 엄마냐?’ 자책했다. 그때도 미안하다는 말도,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칭찬도 못 했다. 아들은 내 곁에 영원히 있을 줄 알았고 ‘지금 여기’에 감사하지 않았다.

공군 훈련소 수료식 며칠 전,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저 오늘 미사드렸어요. 고해성사도 했고요.” 흥분된 아들의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일 종교 참여시간에 성당에 갔는데 성가 소리를 듣는 순간 감정이 복받치며 눈물이 막 쏟아지더란다. 퍼뜩 고해성사가 보고 싶어 고해소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못 하겠더란다. 엄마가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몰래 보았다며 띄엄띄엄 고백하니 신부님께서 “엄마한테 미사드렸다고 전화하라”는 보속을 주셨다는 것이었다.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매달리는 심정으로 묵주 기도를 시작했는데. 어쩜 이 기도도 내가 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기도였는데, 주님의 신비는 이렇게 놀라웠다.

군대에서 성서공부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어린 시절 신앙이 아들을 지켜주는구나. 예수님은 다 뜻이 있구나 했다. 과정을 마친 후 수원교구에서 하는 4박 5일 연수에 참여해야 하는데 본인의 휴가를 써야 해서 모두들 난감해했다. 어쩜 제일 멋진 제대 선물이겠지만 군인들에게 휴가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결국 아들 혼자 참석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들의 결정이 고마웠고 아들이 존경스러웠다.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창세기 연수 과정에 1년 후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나 보다. 낯익은 아들 글씨체를 보자마자 아들이 가슴 뜨겁게 다가와 넋이 나가도록 울었다.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했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갔을까? 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자 애썼던 아들을 붙잡아 줄 수 없었을까?

올해 7주기에 처음으로 아들이 있는 성당에서 아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아마도 신곡2동성당이 생기고 제일 많이 성당을 찾은 분은 프란치스코 엄마일 거라고 기억해주셨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들을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아들을 데려간 이유를 대라고 성전에서 목이 쉬도록 예수님께 따졌다. 지쳐서 소리가 안 나오면 위령기도를 했고 기운이 빠져 엎드려있기도 했다. 아들을 잃고도 엄마가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매일 퇴근 후 아들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났다. 울고 기도하고 다음 날 또 울고 기도하고.

‘하늘의 문’이 나의 근무처와 10분 거리라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비록 예수님은 아무 답도 주시지 않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이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천국행 보험 들듯이 주일 미사만 나가던 날라리 신자인 내가 매일 성체조배를 하다니? 이런 나의 모습을 동정할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도피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부정했고 인간관계를 끊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한테 매달리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살아있을까? 분명 누군가가 이끌어주었다.

자녀를 상실한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들이 떠난 후 나에게는 시간도 함께 멈췄다.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을 죽이며 울었다. 아들한테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켜 함께 걸어가고 같이 살아갈 거야’ 약속했지만, 희망일 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더 두려웠던 것은 아들에 대한 기억도 스물일곱 살에 멈췄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 아들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랬었는데…. ~그랬지….” 자꾸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아들과 학교탐방을 했었다. 학교를 다 돌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아팠다. 정말 넓었다. 온통 초록인 것도 부러웠다. 문득 국립대학이긴 하지만 혜택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록금은 사립대 반밖에 안 내는데 자연환경도 그렇고 혜택이 너무 많은 것 아니니? 열악한 대학들과 나누어야 하지 않나?”하자 아들은 “받은 게 많은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부담도 커요.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함부로 살 수 없으니까요”했다.
 

적폐의 진원으로 소위 학벌 좋은 고위직들이 거론될 때 나는 헷갈렸고 의아했다. 참된 학력에 따른 기준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은 나보다 중·고등학생 때 공부를 더 많이 했고 머리도 좋지 않았을까? 독서도 나보다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대학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4년을 누렸는데? 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바르지 않은 걸까? 당시 교사였던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며 가르쳐야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내 아들이 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자랑스러웠다. 아울러 아들 같은 젊음이 있으니 이 사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아들이지만 존중하고 존경했다. 아들이 채울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엄마가 존중했던 아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불쑥불쑥 아들이 그립다. 설거지하다가도 파란 하늘을 보다가도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처럼 슬픔이 덮치면 몸과 마음이 다 허둥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싶은데 붕 떠서 걷고 있는 것 같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 속을 허우적대며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의 자살은 나에게 끝없는 질문을 하게 했다. 그러나 답을 받을 수 없었다. 미안했고 외로웠다. 아들의 자살은 엄마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자살도 ‘암으로 투병하다가…’ ‘교통사고로 갑자기…’처럼 ‘말할 수 있는 죽음’일까 자신에게 묻고 물었다.

그때 자살도 ‘말할 수 있는 죽음’이라며 손을 잡아준 곳이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다. 자살예방센터는 자살예방교육을 통한 생명운동과 자살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고통스럽게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자살 사별자(유가족)를 위해 ‘유가족 미사’, ‘도보 성지순례’, ‘자살유가족 피정’으로 위로와 봉헌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실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 위로하고 지지하는 자조모임도 한다. 자신의 애도 과정을 돌아보며 서로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매달 만나 슬픔을 토닥이며 힘을 얻는다.

처음 주보에 실린 ‘자살 유가족을 위한 미사’를 보면서 몇 번을 망설였다. 자살 유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 싫었다. 혼자 버티고 혼자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살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싫어 미리 밀어냈고 관계를 단절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썼지만 돌아온 것은 큰 외로움이었다. 내 삶의 한가운데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모르겠고 무력했다. 끈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를 찾아갔고 유가족들을 만났다. 자조모임에 함께했고 올해는 글쓰기 자조모임 봉사도 시작했다. 서로의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문득 나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있지만 분명 예수님은 아들을 가슴에 품어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자살로 잃은 그들의 마음에 같이 울고 애도하며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고통의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는 믿음을 서로에게 심어주고 서로에게서 보았다. 홀로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어진 끈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곁이 되어주고 손잡아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서로의 부축 속에서 예수님께 의지할 때 치유와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돕고 싶었다. 나처럼 혼자서 외롭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살을 ‘말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살아남은 그들이 덜 추운 겨울을 보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더라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세상은 충분히 가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애도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고통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쩜 내가 간절히 원하고 있던 것들일지도 모른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의 동료지원활동가를 지원했다. ‘얘기함(얘기해요 기억해요 함께해요)’에 올라오는 유가족들의 글에 답글을 달고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작별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다. 진정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자살 유가족들이 황망함 속에서도 마음을 토해내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곁에 서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나도 그들처럼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시간이 그날 1분 전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함께 기뻐할 아들이 없어 남들에게는 축제날인 명절이나 생일이 더 공허하다. 행복이란 단어는 언제 써 봤나 아득하다. 그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고통스럽다. 나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답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들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봉사하다 보니 오히려 내가 더 위로를 받기도 한다. 상실의 슬픔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슬픔의 경험과 함께 살아나가는 게 오히려 치유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빛 동생의 글에 ‘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죽음의 흔적보다는 희망의 언어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있다. 나는 이 부분에 머물러 한참을 울었다. 그래. 나도 아들이 마지막까지 살고자 했던 그 선택을 희망의 언어로 기억하고 싶다. 죽음의 흔적에 매달리면 끝을 바라보는 것이지만 희망의 언어로 기억하면 고인과 이어져 있는 거니까. 자살을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자살 유가족은 충격과 슬픔이 너무 커 미화할 힘이 없다. 어떻게든 더 이상 우리 가족과 같은 유가족이 나오지 않도록 자살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말고 애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게 이 사회의 자살을 예방하는 길이고 자살은 어떠한 이유로든 예방되어야 한다는 간절함이다.

최근 유명 배우의 자살 소식에 많이 힘들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은 가족은?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고통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고 추모하며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했지만, 여전히 “죽을 각오로 끝까지 싸워야지.”, “오죽 나약했으면.”, “그러니까 강하게 키워야 돼”하며 일부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말이 다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이젠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자살은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살인이고 타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고인에게 일반화하는 우울증도 암과 같은 질병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나서서 치료하고 예방해야 한다. 자살을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함께 모두가 고민해야 할 사회적 죽음이고 사회 문제라고 인식할 때 사회도 건강해지고 죽음 또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단 한 명이 되어주자. 유가족 중에 자살을 결심하고 문턱까지 갔는데 마지막을 멈추게 한 것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사람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그 사람이 안전지대였던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옆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이 바닥은 원래 그래”가 아니고 함께 손잡아주었다면 아들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엄마로서 아들에게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유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식적이지 않나? 이런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하며 회의에 빠진다. 그럼에도 나는 곁에 서 있는 단 한 명이 되고자 나를 세우고 있다. 나는 비록 이렇게 살아왔지만 다른 자살 유가족들은 나와 같은 자책감과 무력감,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집과 같이 파괴적 슬픔에 묻혀 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희망을 찾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름 끝자락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33살로 삶을 마감한 젊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흔적을 따라 걷고 걸었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기도를 안고 갔는데 곳곳에서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새벽에 갔던 나자렛의 ‘주님탄생예고성당’, 숨을 콱 막히게 했던 끝없는 거친 ‘광야’, 새벽과 밤에 세 번 갔다가 뜻밖에 무덤 속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던 예루살렘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죽음과 부활을 확인하며 많이 울었다. 처음으로 그동안의 슬픔·외로움·무기력·죄책감·수치심·혼란·공포·거부감·분노를 주님께 다 의탁했다. 정말 다 의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고통의 성모님께서 우리 가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결코 없어질 수가 없지만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고 또 헤쳐나가야 될 것임도 가르쳐줬다. 결국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치유와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죽는 날까지 아들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나를 자학하며 떠밀리듯 다녔던 순례길에서 예수님은 나를 가엾이 여기시고 당신의 자비로 나에게 기적을 일으키셨다.

아들의 기일이 있는 10월과 위령 성월인 11월에는 매일 아들을 위한 위령기도를 했고, 매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남편과는 항상 식사 전후 기도를 한다. “한빛 프란치스코와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애써 담담하게 기도하려고 하지만, 어느 날은 한빛 프란치스코에서 멈추며 울컥한다. 그래도 한빛을 부활시켜 함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서 우리는 이 기도를 매일 붙잡고 있다. 우리에게는 감사의 시간이다.

‘하늘의 문’에서 아들을 만나고 성전을 가려면 ‘자비의 초상화’ 앞을 지나간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예수님의 자비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희망의 기도는 단 하나.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였다. 나에게는 구원의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미 많은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하셨다. 내가 모르고 있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이다. 아들 프란치스코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고맙다. 사랑해. 나의 아들 한빛 프란치스코!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



김혜영(사비나, 대전교구 도고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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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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