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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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는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9) 빛의 감각적 현현 - 약간의 기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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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1) 블라디미르의 성모: 104 x 69cm, 템페라, 콘스탄티노플,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하느님은 청각 장애인?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본다면 청각 장애인처럼 바라봐야 합니다. 청각 장애인과 대화를 하려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눈빛, 얼굴 표정과 입술의 움직임, 얼굴에 흐르는 미소, 그 외에 느낌으로 서로에게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 비스듬히 옆으로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악수를 한다면 상대방은 무척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정면 모습은 만남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이콘의 정면 모습은 하느님과 만남을,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면 만남의 자세부터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빛이시기에 그 빛을 많이 받고자 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콘의 인물은 정면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성모의 눈은 하느님의 눈

약간의 기울임, 즉 정면이 아니고 모습이 약 3/4 정도 얼굴을 보이는 약간의 기울임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울어져 위치가 달라져도, 본래의 의도(정면)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약간의 얼굴을 돌리는 것은 좀더 부드러운 모습으로 ‘인간성’이 강조됩니다. 예를 들면 블라디미르 성모 이콘에서 아기 예수님은 아기답게 성모님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맞대고, 팔은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거룩한 아들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바라보는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눈은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작품1)

 
(작품2) 예루살렘 입성: 62 x 4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환호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도대체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도성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다. 여기서 나귀는 ‘이끌림’을 받아 나온 우리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빚문서를 들고 계신다. 즉, 본인을 담보로 제공하고 우리의 죄를 탕감하는 문서이다. (콜로 2,14)


뒤를 돌아보는 이콘의 주체는 없다

이콘의 주체(주인)가 있는 장소에서 뒤로 돌아보는 얼굴은 그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서 계시는데, 군중 중에 어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다면, 결국 그는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이 다윗 왕처럼 임금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높은 귀족도 아니고…”하면서 예수님의 신분을 대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떠들었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는 예수님의 등장에 불안한 부류의 사람을 대신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작품2)

농부는 곡식을 심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어야 합니다. 우선 소에 매어진 쟁기로 갈아 굳은 땅을 풀어 부드럽게 합니다. 그리고 갈린 땅에 난 잡초들은 말라 죽게 됩니다. 뿌려진 곡식 낟알은 언젠가 내릴 비에 의해 싹이 트길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은 잡초와 굳은 땅으로 메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연결해줄 마음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을 쟁기로 갈아 부드러워지게 만들고, 그 마음의 땅에 씨앗을 뿌려 하늘에서 내려줄 성령의 비에 대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는 말씀처럼 얼굴을 돌리는 것은 탁해진 마음을 제대로 갈지 못하고 하느님과 만남을 단절하는,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의미입니다.
 
(작품3) 예수님의 만찬: 55.5 x 43.5cm, 프레스코화, 1778년, 성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수도원, 말루라 지역, 시리아. 모든 사도는 즉 3/4 정도의 얼굴을 보이지만, 유다스는 1/2의 옆모습을 보이며 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떳떳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돈주머니를 잡고 있다.


얼굴 반쪽만 보이고 시선 떨군 유다

정면 얼굴의 눈을 통해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특별한 의도 없이 성인의 옆모습을 그린 것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 사람의 옆모습은 ‘만남의 깨어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눈이 마주치는 것을 끊어버리는 모습입니다. 거룩한 상태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 이콘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은 옆모습으로 떳떳하지 못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봅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함께 있으나, 그들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물론 유다 이스카리옷이 실제로는 본 마음을 숨기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영은 주님의 눈을 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콘에서 다른 제자의 얼굴은 3/4 부분으로 보이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은 얼굴이 1/2만 보이고 밑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작품3)

얼굴은 하느님의 영이 들어온 곳으로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품위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닮은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에 얼굴 없는 이콘은 그리지 않습니다. 헤로데의 명령으로 목이 잘린 요한 세례자는 정상적인 얼굴 모습으로 표현하고, 잘린 본인의 얼굴은 따로 쟁반에 들려 있습니다.(작품4)


 
(작품4) 요한 세례자: 24 x 19.9cm, 16세기 초, 템페라,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두 갈래 나무는 생명의 나무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상징한다. 나뭇가지엔 요한의 도끼가 걸려 있다. 이콘에서 얼굴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모습이고, 잘린 목은 그릇에 담겨 있다.




‘단 한 순간의 눈짓’(아가 4,9)처럼 눈은 몸에 빛을 줍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정화되고 건강해진 영혼의 눈은 볼 수 없는 것을 봅니다. 많은 것을 보고, 또 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보려고 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있어도 동시에 물질적인 것에 잘못 끌려가 정말 보고자 하는 것을 못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 영혼의 눈으로 오로지 선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날카롭고 꿰뚫어 보는 영적 눈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의 빛, 즉 고유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빛은 지극히 아름다운 ‘선의 빛’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인 선은 선으로 남기 위해, 또 다른 가능성을 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향합니다.






주님!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당신 생각뿐,

우리 눈으로 보았던 모든 것은

잠시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를 막으면 들리는 것은 없듯이

귀에 울리는 것은 당신 말씀뿐,

그 외에 귀로 들었던 모든 것은

잠시 울리는 소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코에 불어넣으신 당신의 영으로

생명의 질서를 마련해주시니

빛으로 가득 채운 주님의 성채로서

당신의 나라를 유지해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님! 오로지 당신의 얼굴을 보이소서.



나는 당신의 영과 나의 혼을 일치시켜

당신을 닮은 분유자(分有者)1)로서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나의 영혼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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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하느님의 영을 나누어 받은 자(者)


 



김영부 마오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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