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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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 마음에 품고 새 선교지 태국 샴대목구로 떠나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7. 샴대목구로 파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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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신부가 1826년 12월 마카오에서 선교지로 배속받을 당시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피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림은 샴대목구 관할도. 구글 캡처.

동료 선교사 페코 신부 선종으로 임지 변경

저의 선교 임지가 확정됐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바루델(Jean-Louis Baroudel, 1801~1866) 신부는 제게 샴(태국)으로 떠날 것을 명했습니다. 저는 파리를 떠날 때 코친차이나 선교사로 내정돼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서 파견될 때 장상으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다음, 극동대표부가 배정한 새 선교지로 가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또 선교지에 도착한 후 자원해 새 임지를 바꾸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이상을 꿈꾸던 프랑스와 달리 현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야전 사령부지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은 박해를 비롯한 여러 현지 사정 때문에 파리에서 배속받은 선교지로 갈 수 없을 때가 흔했습니다. 따라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조치에 따라, 선교사들의 빈자리로 긴급하게 떠나야 했습니다. 저 역시 샴에 배속된 동료 선교사 페코 신부가 갑작스레 선종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방콕으로 가게 됐습니다.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피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했습니다. 이렇게 광활한 교구를 64세의 노쇠한 프랑스인 주교 1명과 현지인 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현지인 사제들도 사목 경험이 부족해 일일이 주교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샴대목구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에게 인기가 없는 기피 지역이었습니다. 젊고 혈기 왕성한 유럽인 사제들의 눈에 샴은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황무지로 보였습니다.
 
알렉상드로 드 로드 신부. 예수회 출신 첫 번째 베트남 선교 사제였던 그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에게 아시아 지역에 대목구를 설정하고 선교를 위해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알렉산데르 7세 교황. 그는 로드 신부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 선교를 위해 베트남에 최초로 대목구를 설정했다.

소조폴리스의 명의 주교로 샴대목구장이며, 이 지역의 유일한 유럽인 선교사는 바로 마리 에스프리 플로랑(Marie 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입니다. 그는 프랑스 아비뇽교구 보클뤼즈현 출신입니다. 아비뇽교구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알렉상드로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입니다. 그는 베트남을 최초로 선교한 예수회 사제로, 교황청에 아시아 선교를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교황청이 아시아 선교 정책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교황이 직할하는 ‘대목구’를 설정하고, 교황을 대리하는 명의 주교에게 자치권을 주자고 주장했습니다. 또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현지인 사제를 우선으로 양성해야 한다고 청했습니다.

알렉산데르 7세 교황(재위 1655~1667년)은 로드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1658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대목구를 북베트남과 라오스 일대 지역인 통킹과 코친차이나에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프랑수아 팔뤼 주교와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이들 두 주교는 선교지로 떠나기에 앞서 후속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파리에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이 신학교가 파리외방전교회로 발전하고, 두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공동 설립자가 됩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인 프랑수아 팔뤼 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자인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

샴대목구장이 있는 방콕으로 서둘러 떠나

저는 선교지가 확정되자 샴대목구장이 있는 방콕으로 서둘러 떠나기로 했습니다. 연로한 주교님을 하루라도 빨리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1826년 12월 11일 마카오를 떠났습니다. 마카오로 왔던 항로를 거슬러 다시 믈라카 해협을 지나 페낭 섬으로 가서 육로로 말레이반도를 통과해 방콕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이 길은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이 샴으로 가는 통상적인 루트였습니다. 믈라카 해협은 ‘해상 실크로드’로 불릴 만큼 동서 문화의 교역로입니다. 15세기 초반 중국 명나라 정화(鄭和, 1371~1433?) 선단이 처음으로 개척한 이 해상로는 1510년 포르투갈이 인도 고아를 점령한 이후로 ‘그리스도교 선교 루트’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탄 배는 페낭으로 가기 전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잠시 기착합니다. 항해 내내 저는 조선 교회를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영적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는 조선 교우들이 “사제를 보내달라”는 외침을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826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올 즈음 짬을 내 제 출신 교구인 카르카손교구의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 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에서 페낭으로 가서 말레이반도를 거쳐 육로로 방콕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림은 1830년 페낭 조지타운 프랑긴 운하 모습.

1827년 1월 12일 경유지 페낭에 도착

1827년 1월 12일 페낭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제가 샴으로 가기 위해 페낭으로 온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이미 밝혔듯이 페낭에서 육로로 말레이반도를 지나 방콕으로 가기 위함입니다. 이 경로가 우리 선교사들이 마카오에서 방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둘째는 페낭신학교에 있는 샴대목구 소속 중국인 신학생을 데려갈 것입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 그에게 신품성사를 줘 샴 왕국의 중국인 사목을 맡기실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신학생이 방콕까지 가는 저의 여행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셋째, 저는 이번 여행 동안 말레이반도 내륙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탐구할 계획입니다.(필자 주: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7년 1월 중순부터 1829년 4월 중순까지 2년 3개월여간 샴대목구 선교사 시절에 관한 사목 여행기를 저술했다. 이 사목 여행기는 친구인 프랑스 남부 에르교구 총대리 부스케 신부에게 보내졌고, 그 내용은 리옹에서 발간하는 선교잡지 「전교후원회 연보」 1831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이 여행기는 프랑스와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지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잡지에 실렸고, 1854년 샴대목구장인 장 바티스트 팔구 주교가 2권의 샴 연구서를 발간하기 전까지 샴 왕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소개서로 인정받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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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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