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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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84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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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수위권과 무류성 승인 공의회 우위설 사라지고 교황의 영적권위는 강화 1869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초부터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의 신조화가 이뤄질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시작됐다.
트리엔트 공의회(1548~63) 이후 3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교회는 중대한 시점에 도달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으나 계몽주의와 함께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의 이념은 전 유럽에 전파됐다. 교회는 혁명과 자유주의에 대한 혐오로 보수적 전제 군주들과 제휴했는데 프랑스의 2월 혁명과 오스트리아의 3월 혁명으로 보수적 전제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유럽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자유주의자였던 교황은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바꾸었고 교회가 직면한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공의회의 소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비오 교황은 1854년 12월 8일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됐다」는 오랜 신앙을 교의로 선포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선포 자체보다는 오히려 선포 방식이었다. 즉 그것은 공의회의 결정이 아니라 교황좌의 선언이었다. 여기서 교황이 어느 정도까지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신앙진리를 홀로 결정하고 선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새로 토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에 대해 교황은 모든 주교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성대하게 선포할 때 추기경과 주교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결정한 것은 결국 교황 혼자였다. 10년 뒤인 1864년 12월 8일 교황은 가톨릭의 입장에서 배척돼야 할 80개의 오류를 총괄한 「오류표」(Syllabus)를 모든 주교들에게 보냈다. 여기에서 범신론 자연주의 유리주의(唯理主義) 나아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을 포함해 특히 자유주의와 진보주의가 예리하게 배척됐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갈리아주의 요셉주의 페브로니우스주의 얀센주의에 대응해 교황권 강화를 내세운 교황 지상주의가 다시 등장했다. 이들은 강력한 교황 중앙집권 체제를 주장하면서 교권과 속권을 모두 지닌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하지만 독일의 될링거(Dollinger 1799~1890)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지성인들은 지성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교황의 무류권과 수위권에 대해서 반박하고 공격했다. 교황은 1869년 6월 29일 공의회 개최를 정식으로 발표했다. 개막 전부터 찬반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던 무류성 문제는 12월 2일 공의회가 개막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치지 않았다.
이에 따라서 무류성 문제는 일단 의제에서 제외됐고 교회에 위협을 주던 세속주의 사조들의 문제부터 먼저 다루기 시작했다. 1870년 4월 24일 만장일치로 통과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은 창조주 삼위일체 천주 강생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 등의 정통 교리를 제시했고 이러한 교리를 거부하는 유물론 합리주의 범신론 이신론 합리주의적 성서관 신앙주의 회의론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사상들을 오류로 단죄했다. 이후 공의회에서는 무류성에 대한 의제가 채택됐고 교황은 이 의안을 교회에 관한 헌장에서 다루도록 지시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주교들은 찬성했으나 일부 주교들은 시기상으로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마침내 1870년 7월 1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실시된 표결을 통해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 교리를 담은 교회에 관한 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가 533대2로 승인됐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 표결을 통해 결정된 이 내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회의 최고 권위자로서 교황은 전 교회와 각 교구에 대해 완전히 정상적이고 직접적인 주교권 즉 전 교회의 주교로서의 교황이 지니는 수위권을 지닌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황이 직무의 소유자로서(ex cathedra) 전 교회를 위해 신앙이나 도덕에 관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ex sese) 그르칠 수 없다는 무류성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을 선언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독일의 일부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교들이 수용함에 따라 교황권은 더욱 강력해져 중앙집권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교회 안에서는 13세기부터 내려 오던 「공의회 우위설」과 갈리아주의가 내세웠던 국교회 사상이 사라지게 됐다. 또 교황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속권은 상실됐으나 그 영적인 권위는 오히려 더욱 강화됐고 교황은 이제 세속 군주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는 정신적 지도자로 교회 안에서는 절대적인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 하지만 이 교리 결정이 이뤄진 직후 공의회는 갑자기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이 일어나 많은 교부들이 귀국해야 했고 1870년 9월 20일 로마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공의회를 계속할 수 없었다. 교황의 수위권이 정립됐으나 주교직과의 관계는 정확히 규정되지 않았고 단체성보다 수위성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어야 했지만 결국 유럽의 혼란으로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한 채 공의회는 폐막됐고 이 문제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와서야 다뤄지게 된다. 사진말 -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을 선언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독일의 일부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교들이 수용함에 따라 교황권은 더욱 강력해져 중앙집권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1870년 7월 18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식 광경.
박영호 기자 young@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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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3-07-2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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