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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택 신부 |
‘삼위일체 대축일’이 되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그 유명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성인이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며 해변을 거닐 때 한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조개로 바닷물을 퍼 담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 연유를 물으니 거기에 바닷물을 모두 담기 위해서라고 아이가 답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줄 아느냐고 성인이 물으니 아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 일이냐고 반문하며 천사로 변해 떠나갔다고 합니다.
삼위일체가 머리로 이해하기 불가능한 신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삼위일체는 저 하늘 먼 곳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신비이며, 동시에 인간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 곧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시는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몸소 인간이 되어 오시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분이시라는,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저 먼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울부짖음, 고통과 시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굽어보시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잠깐 내려오셔서 인간의 옷을 입고 사시다 그 옷을 벗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아니라(가현설 이단의 주장),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연약한 인간의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그 극진한 사랑이 아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밝히 드러났으며,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시어 그 사랑과 구원의 업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아버지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가 불멸의 희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로마 8,11 참조)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께서 나누시는 사랑의 친교로의 초대이며,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빠’라고 부르신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던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역시 그분처럼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인지, 아버지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잠깐 나타났다가 우연히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사랑하시는 존재,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막연한 교리가 아니라 교회와 세상 안에 사는 우리 각자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역사는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부어졌습니다.(로마 5,5 참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랑을 알아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 우리 각자가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인지 체험하는 복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시련을 굳건히 견디어내 그 사랑을 닮아갈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한민택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이성과신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