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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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불기(君子不器), 아름다운 목자 예수님!

[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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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의 가장 대표적 회화기법은 ‘여백의 아름다움(美)’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형태로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을 항상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설령, 붓칠을 해도 붓이 지나간 자리는 오묘하게 여백이 겹쳐 있습니다. 여백은 형태를 더욱 부각시키고 움직임을 무한히 확장해 더 생동감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은 비어있지만 다른 사물을 살리는 자리가 바로 여백이며, 그 아름다움의 경지를 ‘여백의 아름다움(美)’이라고 합니다. 이런 예술적 경지를 공자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품격으로 말합니다.

孔子曰  君子不器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고정된 그릇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器(기)’는 좁게는 그릇, 넓게는 정해진 형태를 가진 사물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군자는 고정된 모습의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포용력과 가능성이 열려있어 그림으로 말하면 ‘여백의 아름다움’의 경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자불기’를 핵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구절을 『예기』 「학기」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북은 다섯 가지 소리(궁·상·각·치·우)에 속하지 않지만, 다섯 가지 소리는 (북 없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물은 다섯 가지 색(청·적·황·백·흑)에 속하지 않지만, 다섯 가지 색은 (물 없이) 표현될 수 없다.

북 자체가 소리의 형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양한 소리의 형태는 북을 근거로 살아있게 됩니다. 역시 물 자체가 색깔의 형태는 아니지만 다양한 빛깔이 물을 근거로 표현됩니다. 북과 물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없는 것처럼 있어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주고 살려줍니다. 다양한 소리와 색이 숨 쉬며 생동하는 장소, 창의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그곳, ‘여백의 아름다움(美)’의 경지, 不器(불기)의  품격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품격과 바탕을 찾아본다면 ‘착한 목자’(요한 10,11)의 품격에서 찾아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착한’은 ‘칼로스’인데 이 단어는 ‘아름다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좋다’고 하신 말씀도 희랍어로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좋다’는 도덕적 의미에서 ‘선’으로, 예술적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라 말해집니다. 그 최고의 경지에 있는 이가 ‘아름다운(착한) 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착한 목자라 한 이유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생명’에는 ‘조에’와 ‘비오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조에’는 ‘생명 자체’ 혹은 ‘신적 생명(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비오스’는 ‘생물학적 생명’ 혹은 ‘생애(인생)’나 ‘살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모습의 ‘살이’는 생명 자체인 신적 생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 생명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생명 자체는 모양도 꼴도 없지만, 그 위에서 다양한 ‘생애(살이)’가 만들어집니다. 창세기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진흙으로 빚은 후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 숨은 세상 창조의 숨이며, 인간 생명은 창조적인 신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생명 자체가 다양한 모습을 갖는 ‘생애’의 형태는 아니지만, 모든 구체적 ‘생애’가 만들어지고 살아나는 不器(불기)한 자리, 창조적 아름다움이 충만한 여백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조에’의 바탕에서 ‘비오스’는 창조적으로 다양한 그릇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조에)이다.’(요한 14,6)

붓칠을 해도 오묘하게 여백이 겹쳐 있듯, 내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에 오묘하게 예수님이 겹쳐 있다면 우리는 여백의 아름다움, ‘군자불기’의 품격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좌절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인생(생애)은 하나의 그릇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조각나고 깨어진 삶의 자리가 오히려 ‘생명 자체(신적 생명)’, 즉 ‘조에’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창조적으로 다시 만들면 됩니다. ‘비오스’에 집착해 ‘조에’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아름다운 목자 예수님이 우리의 창조적 여백이 되어주십니다.

오늘은 반나절 동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낮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눈의 여백을 잃어서입니다. 강론을 쓸 때도, 정보를 모을 때도, 사람과 소통할 때도 컴퓨터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빛과 강렬한 색이 눈의 여백을 도둑질해 갔습니다. 여백을 버리고 빛과 색을 택하고 나니 거꾸로 빛도 색도 눈을 배신하여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에’의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까지 잃고 싶지 않군요. ‘아름다운(착한) 목자 예수님!’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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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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