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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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7.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⑦

예수 강생,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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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강생 사건은 인간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 당신 계획에 지극히 충실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사진은 한 우크라이나 가톨릭 성당에 있는 예수 탄생 이콘. CNS 자료사진

 
그리스도 강생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신심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녀 데레사의 예수님 사랑에는 그분의 인성(人性)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특히, 성녀 데레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에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성녀가 20살에 수도생활을 시작해서 약 30년 동안 살았던 가르멜 수녀원은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하며 강생하신 예수님께 봉헌됐다고 해서 통상 ‘강생 수녀원’이라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성녀는 자신이 창립한 17개의 가르멜 수녀원 가운데 첫 번째로 세워진 아빌라의 맨발 가르멜 수녀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앞문에는 요셉 성인이 그리고 뒷문에는 성모님이 수문장으로 계시며 수녀원 안에는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늘 현존해 계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성녀 데레사는 강생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근본 이유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고 생각합니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 역사상 무수한 성인 성녀, 학자, 교회 어른들은 예수님 강생의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며 그 사건이 간직한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강생의 첫째 이유로 드는 것이 원죄(原罪: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본죄(本罪: 각 개인이 지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우리를 건져 올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강생에 대한 소극적 차원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상 적지 않은 교부들, 신학자들은 강생 사건에 담겨 있는 더욱 심오한 차원을 설명하고자 시도해 왔습니다. 중세의 둔스 스코투스 같은 분은, “만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하고 반문하며 강생의 이유를 오로지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차원에만 국한한다면 더 깊은 강생의 신비를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부터의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 더 원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우리 각자를 위해 실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그러면 ‘하느님의 계획’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계획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이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기 이전에 영원으로부터 우리 각자를 위한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온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인인 당신과 영원히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지복(至福)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합일’이 완전히 실현되는 상태,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궁극적인 삶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만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성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당신의 계획을 충만히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충만히 실현돼 가는 과정을 전통적으로 인간의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것은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는 ‘구원’의 차원뿐만 아니라 천상(天上)을 향해 날아오르는 ‘성화’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게 하려 함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충만히 실현하는 그리스도의 강생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 계획의 내용인 ‘하느님과의 합일’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그 자체로 이미 두 인격 사이의 ‘만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합일은 인격 상호 간의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동등성(同等性)’을 전제로 합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인격적 사랑의 합일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개와 사람이 이런 인격적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합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면에서 볼 때 동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절대자이시고 이 피조 세계 전체를 초월하는 영원한 분이지만, 인간은 한 줌 재로 돌아갈 썩어 없어지고 말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등성’은 인격적인 합일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동등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과 동등해지기 위해 인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인간 차원으로 내려오실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참된 의미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서 인간 편에까지 내려오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 사건은 모든 실재와 피조물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난 사건이자 인간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당신 자신이 지극히 충실하시다고 하는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의 여정을 통해 이루어가야 할 소명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해될 수 있고, 우리는 그 심오한 신비를 예수님의 강생 사건 안에서 관상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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